(72) 진보당사건(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진보당사건을 다루었던 수사당국자들은 죽산이 공산당의 함정에 빠졌음을 시인했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당시 피고인측이었던 사람은 당시도 또 지금도 그들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할 성질의 사건도 아니었다는 주장에 변함이 없다.

<증언대 안세워줘>
죽산의 따님 조호정씨는 말한다. 『달러화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내가 증언했다구요. 나는 소위 북으로 보냈다는 만년필 문제를 증언하려 했지만 법정의 증언대에 세워주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서 증언했다는 건가요. 난 아버님의 하나뿐인 딸이었어요. 나는 달러화를 바꾸는 암시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진보당에 공산당 출신이 많았다는데 대해서도 조직부간사 전세룡씨는 오히려 우익 청년단출신이나 군출신이 중심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재판 때 당원중에 남로당출신이 있으면 대보라고 했어요. 우리는 제3세력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위해 좌경했던 사람은 당원으로 받지 않기로 했어요』라는 주장이다.
진보당의 정강정책이 북의 노동당의 3대 기본노선과 합치된다는 수사팀의 주장에 대해 정책이나 강령을 기초했던 신도성·이동화씨는 『그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일축했다.
신도성씨의 얘기.
『재판 때 증언에서도 분명히 했지만 진보당의 정책은 수정자본주의노선이다. 사회주의 운동이란 자본주의가 어느정도 고도화되고 노동운동이 정착돼 있어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50년대의 우리나라는 그런 단계에 훨씬 못미치고 있었다. 당명인 진보당도 내가 제안해서 결정한 것이다.
당시 서상일씨도 그랬고 대부분이 혁신이나 사회라는 용어들을 좋아했지만 나는 그 단계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진보라는 말을 썼다. 미국같은 나라에서도 진보라고 할때 그것은 자유주의의 뜻을 담고 있쟎은가. 당시 우리들의 판단은 먼훗날의 열매를 위해 한국에 진보주의의 씨를 뿌리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죽산이 흔쾌히 받아들여 당명을 진보당으로 했고 정책도 거기에 바탕해 마련되었다.
당시 성대교수로 강령을 기초했던 이동화교수의 회고 역시 신씨와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범야정당운동이 실패한 뒤 범혁신정당이 태동했다. 그 무렵인데 서상일씨가 만나자고 해 갔더니 조봉암·신도성·윤길중씨등 10여명이 모여있는 자리였다. 신당의 정책등 기본방향올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강령을 나보고 작성해 보라는 위촉이 있었다. 수탁은 했지만 대학 일이 바빠 이미 두세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2백자 원고지 1백장선의 강령을 기초했다. 이 강령이 완성된 때가 5·15정부통령 선거후거나, 아뭏든 그 무렵이다. 이미 서상일씨는 죽산과 갈라설 결심이어서 이를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그랬지만 역시 창당을 서두르던 죽산쪽에서 넘겨 달라고해 결국 프린트한 강령을 넘겨주었다.
내가 기초한 강령에서 나는 6·25를 경험한 우리들의 입장이기에 반공을 뚜렷이 했다. 이것은 선진국사회주의 정당에서는 볼수 없는 것이다. 기본 정책면에서도 수정자본주의 방향이었다. 자본주의의 자기수정적 노력은 20세기초부터 나타난 흐름이다. 서방의 사회주의 정당도 낡은 국유만능의 사고를 수정하면서 자본주의의 테두리안에서 민주적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현실적 정책을 채택하고 또 실현하고있다.

<이동화씨가 기초>
간추려 말한다면 한국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본질은 「점진주의」 「사회개량주의」라는 점에 있다. 요컨대 그것은 ①자본주의사회 자체에 의한 자발적인 자본주의 수정의 노력 ②사회적 민주주의 세력의 이를 위한 주체적 노력 ③소비에트 공산세계가 서방에 주는 자극과 충격, 이런 3개 요인의 상관적 작용으로 민주적·평화적 방식의 자본주의 수정과 민주적 복지사회 건설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강령에 담긴 기본이다. 그점에서 강령은 선진국의 민주사회주의 노선과 비교할때 가장 우파적인 입장이었다…강령의 기초단계에서 죽산이 의견을 말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문제를 포함시킬수는 없겠느냐는거였다. 원자무기는 역설적으로는 평화를 열었다는 측면이 있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다. 또 동력으로서의 원자력은 사회생산성을 제고한다. 그렇지만 원자력은 사자본이 다룰수는 없고 다루어서도 안되는 동력, 다시말해 가장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강령속에 언급할만 하다고 판단해 죽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짧게 언급됐다.
통일문제인데 평화통일이란 말이 북의 용어와 같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민주적 통일」이라고 썼다. 민주적이라고 할때 그속에는 평화가 포함된다. 동시에 통일방법이 민주여야하고 당연히 통일된 한국도 민주국가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것이 나중 평화로 고쳐졌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골격은 수정되지 않았다는데서 북의 이른바 평화통일이라는 선전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이동화씨는 죽산의 사상적 전향을 믿지않는 사람들에 대해 그것은 정말 무식의 소치라고 주장했다. 도대체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수단으로서 공산당에 경사했던 것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교수의 그에 대한 주장.
『일제하에서 한국의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좌경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였다. 첫째 당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간에 이론면에서 분화가 돼있지 않았다. 민주적 사회주의 의식을 신념으로 갖는 진보적 인텔리가 스스로를 공산주의와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둘째 식민지해방이란 문제에서 당시는 모스크바만이 열성적이었다. 유럽의 사회주의자 마저도 식민지문제는 등한시했었다. 그러기에 민족해방·민족독립을 제1의 과제로 하고 있던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가 모스크바로 경사해간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세째 해방후 한국의 좌익세력, 특히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좇아 민족주의를 배반했다. 해방후의 혼란,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진보적 인텔리가 반공적 입장에 서게 된 것은 그가 일제하에서 좌경했던 것 이상으로 당연한 일이다. 해방전의 공산당운동경력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은 그 시대에 대해 무식하다고 말해야한다. 이씨는 평양에서 겪었던 그의 경험을 『공산두목들의 크렘린에 대한 맹신적 신앙, 괴뢰적 성격, 그들의 협일한 계급주의적 편견, 과격무리한 계급정책등은 자유주의및 인도주의적 분위기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자존심 강한 인텔리로서는 참고 견딜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죽산은 공산주의사상을 청산한지 오랜 정치인이었다고 했다.
죽산은 말이 없다. 죽산은 그의 정치행로에서 공산당 운동을 했다는 경력이 언제나 장애가 되었고 끝내 그 전력이 그의 정치에 한계를 긋고 말았다. 죽산은 어떤 얼굴의 정치인이었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