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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되찾은 반쪽의 역사, 허스토리<herstor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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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반세기, 여성과 남성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둘러싸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아주 극적인 일들이 벌어져 왔다. 1960년대 초 미국 중산층 주부의 행복신화를 다룬 예사롭지 못한 한 권의 책이 출간됐는데, 『여성의 신비』라는 그 책은 곧 전 세계 여성들에게 전파돼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바꾸어 내는 혁명서가 되었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 안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억압에서 풀려나는 과정을 통해 보다 활기찬 존재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그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인 남성 소설가 필립 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여성이란 존재는 미스터리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남자로서의 내가 그렇다.
나는 여성이 어디에 ‘소용’이 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남성은 어디에 ‘소용’이 된단 말인가?
‘나는 남자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삶이 아주 팍팍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몹시 황폐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구가 생겨나고 있다.

광복 후 한국 사회는 사실상 개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속도로 변해 왔다. 특히 여성의 삶은 그랬다. 48년 ‘자주 독립 국가’의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부여받게 되면서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자주 독립 국민’으로 성장해 갔다. 60~70년대 젊은 여성들은 부부만이 존재하는 단출한 가정을 꿈꾸기 시작했다. 타인의 출입을 방지하는 아파트식 주거 형태는 그 꿈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톡톡히 한몫을 했다. 핵가족의 주인공이 된 어머니들은 오로지 자식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부모 된 도리’라기보다는 자아 성취의 방법이기 때문에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의 행보를 비웃으며 실질적으로 교육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매니저형 전문 어머니군은 지난 60년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낸 시대의 독특한 산물이다.

한두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아들만이 아니라 딸들을 사회로 진출시키기 시작했다.‘자기만의 방’을 지원하며 공적 영역에 도전할 것을 부추겼다. 딸들은 다양한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 갔다. 여성 사회 진출 4세대가 되는 지금, 여성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파워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역사란 눌린 자의 아우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선각’한 여성들은 집단적 행동을 통해 꾸준히 ‘사회 개조’작업을 해 왔다.

‘봉건적 가부장제’의 균열을 내는 과정에는 ‘개화한’ 남성들도 적극 동참하였다. 그러나 ‘근대적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가족법 개정부터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 성매매 방지법에 이르기까지, 여성부가 만들어지기까지, 또한 안전한 밤길 걷기 운동, 여아 낙태 반대 운동을 위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과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이 ‘투쟁’과 축제의 언어를 통해 새 역사를 쓰는 대열에 참여했다. 지금 여성 파워가 너무 세서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정말 여성 파워가 그렇게 강해졌는가? 실제 공식적 세상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은 국제 남녀평등지표에서 여전히 끝부분 어딘가에 자리하는 나라다. “애완동물을 없애면 강남 가족이 해체되고 텔레비전을 없애면 강북 가족이 해체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성찰적인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면서 만들어 온 사회의 모습이란 말인가? 딸들은 이제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상처받은 아이들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노부모들, 혼이 나간 듯 방황하는 중년 남자들을 보면서 이들은 묻는다. 이토록 돌봄과 배려가 결핍된 상태가 바로 우리 여자들이 원했던 사회란 말인가? 초고속 물질생산을 추구했던 근대의 주인공 남자들은 지금 성찰의 시간대로 들어가고 있는가? 사회의 재생을 위해 써야 할 마지막 남은 국고를 허망하게 날려 버리고 있지나 않은가? 난데없이 불기 시작한 ‘개발과 부동산 투기 바람’에 사회는 더욱 급격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

지금은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해내야 할 시점이다.‘개발과 토건적 국가’에서 ‘돌봄의 시민사회’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최소한의 돌봄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세대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삭풍 속에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생명 자체의 유지가 어려워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개인을, 가족을, 학교를,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그때의 ‘보호자’는 관리와 통제에 익숙해진 사람이 아니라 돌봄의 감각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세대에 걸친 돌봄과 양육의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미 공동 육아와 생협, 마을학교 만들기 작업에 착수한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공생의 사회를 만드는 일. 돌봄의 감각이 살아 있는 제도 만들기. 내가 지금 시점에 주목하는 국민은 바로 이들, 공적 영역에서 일하면서도 그 논리에 매몰되지 않은 여성들과 가정 영역에서 도구적 모성에 빠져들지 않은 여성들이다. ‘사모님’과 ‘아줌마’라는 계급 경계를 넘어, ‘아줌마’와 ‘아가씨’라는 세대 경계를 넘어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연합전선을 펼치는 그들. 이들 간의 접선이 이루어질 때 돌연변이적 사회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가 이 땅에 존속해 나간다면 그 인류사는 바로 이들이 써낼 역사일 것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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