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지폐에 과학자 얼굴 넣기' 앞장선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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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섭 교수가 과학자 아인슈타인·가우스·테슬라의 초상이 각각 들어있는 화폐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승식 기자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의사인 정태섭(51.연세대 의대)교수의 연구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망원경이 책상에 놓여있는가 하면, 천장엔 헬륨가스를 넣은 풍선이 매달려 있다. 한쪽 벽에는 X-레이로 촬영한 가족의 뼈 사진이 걸려 있다. 다른 쪽 벽엔 '10만원권 지폐 과학자(장영실) 얼굴 올리기 운동'이라고 쓰인 커다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정 교수는 지난해 초 동료 의사 및 과학계 인사들과 함께 '새 화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모시기 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어 그는 6개월 동안 2257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 한국은행에 전달했고, 6월엔 새 화폐 도안 토론회에 과학자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과학 발전이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됩니다. 화폐에 자랑스러운 우리 과학자의 초상을 담는 것은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

도대체 의사가 왜 과학계 일에 열을 올리는 걸까.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다"는 그는 "다양한 의학 분야 가운데 영상의학과를 선택한 것도 가장 과학과 밀접한 학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 교수가 과학자의 초상을 화폐 도안에 넣어야 한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1989년. 미국에 출장을 갔다 100달러짜리 지폐에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서다. 그때부터 그는 과학자가 등장한 화폐를 모으는 데 열중했다. 지금까지 각국 화폐 100여 종을 수집했다.

"자국의 유명 과학자 얼굴을 넣은 외국 화폐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지폐에는 아인슈타인의 초상이, 폴란드.영국 지폐에는 퀴리 부인과 다윈의 초상이 들어있죠."

정 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67년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온 그는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같이 놀 친구가 없던 그는 청계천 등지의 고서점과 고물상을 돌아다니며 책과 화폐, 기계류를 모으는데 빠져들었다.

덕분에 고교생 때 이미 국내 100위에 드는 화폐 수집가가 됐을 정도였다. 또 전축이나 천체망원경을 조립해 팔아 돈을 벌 만큼 기계류에도 전문가가 됐다. 그 덕에 의대에선 연극반 조명기사로 이름을 날렸고, 군의관 시절엔 지역 주민들의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쳐줘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는 매년 두 차례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별 보기 한마당' 행사를 연다. MBC-TV의 어린이 과학 프로그램에도 출연 중이다. 그는 "과학에 대한 관심은 사춘기 전에 시작돼야 한다"며 "어린이들에게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acirfa@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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