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비운의 경천사 십층석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지난 10년간 해체.수리를 거쳐 복원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 높이 13.5m, 무게 110t)이 서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동 내의 '역사의 길' 중앙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탑','기원자들의 병을 치유해 주었던 약황탑(藥皇塔)','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모델이 되었던 탑' 등 여러 수식어를 동반한 아름다운 탑으로 그 명성이 높은 이 탑은, 고려의 쇠퇴가 차츰 예견되던 1348년 충목왕 4년에 처음 조성됐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탑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세 차례나 이전하는 아픔을 겪는 등 역사적으로 수난을 당했다.

수난의 시작은 조선시대부터였다. 경천사가 문을 닫게 된 이유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반종교적인 정서와 미신의 이유 등으로 탑의 기단부는 물론이거니와 1층에서부터 3층으로 이어진 각각 20면의 불교 관련 도상이 매우 심하게 떼어져 나갔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그늘 아래서였다. 탑은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1843~1939)의 그릇된 욕망에 기인하여 일본으로 밀반출된다. 이후 10여 년을 이국에서 표류한 뒤 경천사탑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E 베델(영국 언론인, 한국명:裵說.1872~1909)과 지난 5일 서거 56주기를 맞았던 호머 베잘릴 헐버트(미국 언어학자.사학자.선교사, 한국명:轄甫.1863~1949)에 의해 1918년, 일본으로 침탈당한 지 만 12년 만에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이후에도 약 40년간을 해체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 1959년에 훼손된 부위를 시멘트로 복원하였으며, 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0년 전인 95년 풍화작용과 산성화 등 문제점이 노출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해체.보존처리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이 비운의 탑이 조성 657년 만에 안식의 새 보금자리를 잡았다. 산성비에도, 6도 정도의 강진에도 끄떡없는 박물관의 VIP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야밤에 해체돼 일본으로 건너가 토막토막 동강난 채 10여 년을 방치상태로 있다가 귀국, 이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40년간 방치, 그리고 시멘트를 이용한 복원 등과 같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온 경천사탑. 이제 편안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영원히 그 자리에서 위엄을 뽐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진심으로 용산이 이제 이 탑의 최후의 정착지가 됐으면 한다. 이러한 여망을 기리기 위해 중앙박물관에서는 이건기(移健記)를 만들어 영구히 보관하기로 하였다.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상징하는 금판에 이러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최첨단 신소재인 진공상태의 티타늄 함에 담아 별도의 장소에 안치한 것이다. 이제 경천사 십층석탑은 지금까지는 비극적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건기에 남긴 채 새로운 면모 속에서 영생을 꿈꾸게 되었다.

이 탑을 통해 우리는 우리 문화재 전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문화재 대부분은 경천사탑과 같은 운명 속에 지금껏 존재해 왔으며, 그 수량마저도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재가 망향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아직도 고국을 떠나 표류하고 있다.

또 문화재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보호.보존해야 하는 국립중앙박물관도 지금까지 사정이 비슷했다. 일곱 번의 이전을 거쳐 드디어 용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중앙박물관도, 비운의 문화재들도 최종 안식처가 용산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염원을 모아 세계 6대 박물관의 면모를 갖추고 10월 28일 장대하게 개관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