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거품 일본의 실패에서 배운다] 거품 방치하다 허겁지겁 '뒷북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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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거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 일본. 1980년대 중반부터 91년 초까지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뒤 곤두박질하길 다시 10여년. 거품이 컸던 만큼 붕괴의 아픔도 크고 깊었다. 오죽했으면 그때를 '잃어 버린 10년'이라 할까. 당시 일본의 정책 담당자들은 뭘 어떻게 했기에 이런 '국난'을 방치했던 것일까. 거품 붕괴 15년, 그 참담했던 시간을 지낸 뒤 이제 그 주역들이 입을 열었다.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 이들의 반성문은 그대로 우리 경제의 '반면교사'다. 2000조원이 넘는 땅값, 435조원이나 되는 부동자금, 그칠 줄 모르고 오르는 강남 집값…. 이달 말 뛰는 집값과 땅값을 잡기 위해 '헌법만큼 고치기 어려운 대책'을 내놓을 계획인 한국 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에게도 이들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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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누키 다미스케 자민당 의원과 후지와라 요시카즈 히가시니혼(東日本) 건설보증사 사장, 국토교통성 스토 도시카즈 토지정보과장은 모두 거품 시기 일본 경제 정책의 핵심 관료였다. 이들은 "정부는 항상 부동산 가격이 오를 만큼 오른 뒤 뒷북만 쳤다"고 시인한 뒤 "정부 부처 간 정책이 서로 모순투성이였던 것이 거품을 낳게 한 결정적인 패착"이라고 진단했다.

◆ 부동산 거품의 원인은=" '가치'와 '가격'의 기본이 무너졌다. '집과 땅을 사두면 오를 것'이란 생각이 급속히 번졌다. 당시 부동산 거품을 부추긴 최대 원인은 금융이었다. 국토청이나 건설성은 '감시구역 도입' 등 대책을 마련했고, 공급을 늘려 수요에 맞추려 노력도 했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과도하게 대출을 해 주면서 수요를 왜곡했다. '땅 사세요. 돈 빌려드립니다. 등기료도 빌려 드립니다. 부동산을 사야 득이 됩니다'라며 은행이 고객을 부추기자 거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러다 갑자기 대출을 죄자 찬물이 끼얹어졌다. 경제는 올스톱됐다. "(와타누키)

"금융이 주범이다. 누구나 과잉 유동성이 문제란 것을 알면서 손을 대지 못했다. 대장성 은행국에서 부동산 대출은 실수요자에게만 해 주도록 금융기관에 '협조요청'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조사지도'를 했다. 불필요한 부동산이나 땅을 사는 데 돈을 빌려줬는지 조사한 것이었다.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대장성이 마침내 '부동산 관련 융자 총량규제 법'을 만든 것이 90년 4월이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은행에 대한 '협력요청''특별조사지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게 부동산 융자를 늘려간 제2금융권과의 경쟁 때문이었다. "(후지와라)

◆ 당시 패착은= "계속 뒷북을 친 것이다. 국토청 장관에 취임한 지 3개월 후인 86년 10월 전국의 지가변동 결과가 나왔다. 심상치 않았다. 고토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 관방장관에게 '이대로 가면 부동산 문제가 심각해지니 긴급 토지 각료회의를 열자'고 했다. 그랬더니 '땅 문제는 못 건드린다'고 했다. 이처럼 정부 안에도 이견이 많았다. 결국 땅값이 오를 대로 오른 다음에야 '긴급토지대책각료회의'가 열렸다.

정부 정책 간에 모순도 많았다. 국토청 장관 시절 부동산 단기 차익을 노린 양도에는 중과세 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 대장성에선 되레 금리를 0.25%포인트 낮추고 엔고에 대처한다며 6조엔의 돈을 추가로 시장에 푸는 정책을 내놨다. 그런 모순투성이의 정책이 부동산 거품을 낳게 한 패착이다. 또 거품이 피크에 달했던 90년엔 통화 공급량이 매달 두 자릿수로 늘었다. 나는 당시 건설상이었는데 '이거 통제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경제기획청은 '물가는 문제없다. 이젠 인플레가 없는 시대'라고 하더라. 거품을 제대로 컨트롤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었는데 오히려 키우고 말았다. 부동산 대책은 금리 등 종합 경제대책을 통해 이뤄져야 했다. "(와타누키)

"종합 대책이 없는 데다 대응도 늦었다. 종합적 대책과는 별개로 일단 단기 대응책도 마련해야 하는데 이 또한 늦었다. 투기적 수요가 생기면 초기에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걸 못했다. 당시 은행의 부동산 담보대출이 담보가액의 60%에서 120%까지 치솟았다. 제2금융권은 이보다 더했다. 그러다 보니 거품 붕괴 후 이들 회사는 다 망했다. 거래제한과 감시구역제도를 도입하고 보유세 강화, 특별토지보유세 대상 확대 등도 했지만 거품을 터뜨리지 못했다."(후지와라)

"86년부터 거품이 본격화했지만 정부 대처는 안이했다. 거래규제 정도로는 소용이 없었다. 부동산 융자 총량규제도 90년 초에야 했다. 강물에 비유하자면 세제를 통한 규제는 하류다. 사후적인 대책이기 때문이다. 실거래가로 과세해 양도차익의 60%까지 세금으로 징수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근본적으로는 상류에서 돈이 흘러 내려가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부동산 대책은 홍수대책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부동산 대책은 또 금리정책과도 연동돼야 한다. 90년 일본은행이 부동산은 거품으로 가는데 금리를 인하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시인한 것도 그 때문이다."(스토)

◆ 얻은 교훈은="부동산 세제를 강화해 세금을 거둬들이기 시작하면 지방세건 국세건 해당 부처 입장에선 그 맛을 알게 돼 그만둘 수 없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되면 세제 자체가 일그러진 형태가 돼 버리고 만다. 세제에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왜 보유세를 올려야 하는가, 어느 정도의 부담이 적정한가 등을 명확히 해야 한다. 중과세가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집과 땅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부터 토해내게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중과세 정책을 피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요소를 가미해 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와 생각하면 역시 집값과 땅값은 정부가 정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정해지는 '정상적 상황'을 만드는 데 충실하면 된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어쨌든 공급을 늘려야 한다'며 도쿄만 매립, 도쿄역 재개발 등의 안을 냈는데 그런 무리한 개발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와타누키)

"거품은 언젠가 터진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거품을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터뜨리는 게 열쇠다. 은행이 여유자금을 돌릴 데가 없다면 금융 정책만으로 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재정을 동원해야 했다.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국채를 살 수 있도록 해 부동자금을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는 그걸 전혀 안 했다."(후지와라)

◆ 한국에 해 주고 싶은 조언은="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지만 거품 붕괴 후가 중요하다. 소프트 랜딩(연착륙)이 중요한 것이다. 정책을 마련할 때 단순히 거품을 터뜨리는 선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가까지 감안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규 부동산 공급을 늘리되 수요에 맞게 해야 한다. 소형으로 할 것이냐 중대형으로 할 것이냐는 정부 철학에 의해 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실질 수요가 어떤지를 감안해 이뤄져야만 한다."(후지와라)

"무엇보다 원천적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제2금융권을 통해 돈이 풀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게 시급하다. 다만 이런 억제 조치는 2년 정도 단기적으로 해야 한다. 너무 오래 끌면 부동산 시장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 세금을 통한 거래규제는 한계가 있다.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품은 있는 법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 지가가 오르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한국은 전국의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지만 수도권은 부족한 것으로 안다. 세제 같은 단기 대책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수요에 맞는 공급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강남 집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에 비상대책으로 거래제한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짧은 기간으로 끝내야 한다. 왜냐하면 수요 자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종 수요자가 있는 한 어떤 방법을 실시해도 거래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법이다. 강북개발을 통한 불균형 시정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지만 서울 사람들이 강남을 좋아하는 건 그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강북을 개발한다고 해도 균형을 맞추지는 못할 것이다. 도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북서쪽 지역을 개발해도 미나토(港)구 등 동남쪽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스토)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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