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위에 선 여인 같은, 관능적인 구두 만들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7면

프랑스 파리 시내 중심부의 포부생토노레가(街)에는 내로라하는 명품숍이 줄지어 있다. 같은 거리에 있는 프랑스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루브르 박물관 근처까지 1㎞ 남짓한 길 양쪽으로 세계 패션계를 주름잡는 각종 매장이 빼곡하다.

그 중에 색다른 풍경으로 지나는 이들의 이목을 끄는 곳이 있다. 브랜드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매장이다.

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수십명이 거의 매일 줄지어 서 있다.‘아찔하다’는 표현이 늘 따라 붙는 뾰족한 굽 구두,‘스틸레토 힐(stilletto heel)’의 창시자 로저 비비에(1907~98)의 자취를 더듬는 사람들일까. 전설이 떠나고 브랜드의 유산을 물려 받은 디자이너 브루노 프리조니(Bruno Frisoni·54·큰 사진)를 만났다. 그는 로저 비비에의 역사와 프리조니의 10년 창작물을 엮어낸 전시회 ‘로저 비비에-아이콘스 커넥티드’를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방한했다.

오랜 세월동안 여성들을 유혹해 온 구두장이들은 굽 모양에 공을 들였다. 여성 구두 굽을 한없이 높게 만드는가 하면 뭉툭하게 깎기도 했다. 배흘림 기둥을 닮은 굽, 온갖 기하학을 동원해 각종 입체를 쌓아 올린 굽도 있다. 이 중에서도 둥글고 육감적인 구두 뒷축을 타고 흘러내리는 날렵하고 뾰족한 굽, ‘스틸레토 힐’은 현대 패션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다. 뇌쇄적인 여성미를 표현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로저 비비에

작고한 로저 비비에는 54년 단단하고 예리한 강철 굽이 달린 여성 구두를 선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대 세계 패션을 호령한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였다. 비비에 이전에도 스틸레토 힐 구두는 있었지만 이를 대중에 널리 알려 패션 아이콘으로 만든 이는 로저 비비에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비비에를 가리켜 “제화계의 파베르제”라고 했다. 파베르제는 19세기 러시아 황제를 위해 정교한 보석 세공을 해 세계적 명성을 쌓은 이다.

브랜드 로저 비비에는 창립자 사망 후 잊혀지는 듯 하다가 이탈리아 대표 명품 기업인 토즈그룹에 인수돼 부활했다. 2004년 프리조니를 창조부문 총괄로 영입해 구두를 비롯, 가방 등 액세서리와 선글라스·장신구 등을 내는 종합 브랜드로 거듭났다. 현대 패션 역사의 한 장(章)을 차지한 사람의 뒤를 잇는 프리조니의 각오는 어땠을까. 게다가 명맥이 끊기는 듯 했던 브랜드를 살려내야 하는 특명까지 짊어진 그에게 비비에의 명성이 버겁진 않았을까.

“부담스럽지 않았다. 신나는 제안이었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니, 누구라도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당연히 응했을 것이다. 내게 패션은 일이 아니라 즐거운 무엇이다. 내게 로저 비비에는 시대를 앞선 뛰어난 디자이너이고 창조의 근원 같은 사람이다.”

1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위해 로저 비비에가 디자인한 구두를 재현했다. 루비로 장식한 금빛 새끼 염소 가죽 샌들이다. 2 ‘버귤(virgule)’ 힐로 된 ‘노랑 새틴 펌프스’, 63년 작품이다. 3 에메랄드로 수놓은 ‘초록 새틴 펌프스’, 87년 작이다. [사진 아기트오베르·로저비비에]

스무살에 구두 디자인에 뛰어든 프리조니는 랑방·크리스찬라크르와·지방시 등 프랑스 대표 패션 브랜드에서 일을 하며 입지를 다졌다. 어린 시절 그의 우상이던 구두 업계의 전설 비비에에 대해 프리조니는 “세련미와 현대성, 구두를 건축과 같이 정밀하게 설계한 것이 비비에의 업적이다. 그는 과거 부유층을 위한 파리의 대표 액세서리를 창조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비비에의 스틸레토 힐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정을 표현했다.

“마치 얇은 바늘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구두가 스틸레토 힐이다. 사랑을 위한 구두라고 해야 하나. 바늘 위에 선 여인은 관능적으로 다가온다. 스틸레토 힐은 여성을 위한 구두인 동시에 남성을 위한 신발이다.”

프리조니의 말처럼 대중은 스틸레토 힐을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미를 뽐내기에 좋은 구두라고 여기지만 정작 이를 신는 여성들은 너무 높고 뾰족해 불편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프리조니는 “반드시 스틸레토 힐의 굽이 높아야만 관능적인 게 아니다. 높이에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여성미를 품고 있는 구두”라고 했다.

모델 이네스 드라프레상주(왼쪽)와 ‘로저 비비에’의 디자인 총괄인 브루노 프리조니.

인터뷰 도중 이네스 드라프레상주(Ines de La Fressange·57)가 다가왔다. 세계적인 모델 출신의 드라프레상주는 브랜드의 홍보대사로, 프리조니의 친구로, 여성들이 원하는 구두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다. 두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예쁘고 좋은 구두를 고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프리조니는 “아름답지 않은 구두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구두에 안 어울리는 옷을 입었거나 양말을 잘못 택했을 것이다. 어색한 차림을 하면 예쁜 여성도 미워보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름답지 않은 신발은 없다.”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라프레상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지금 신고 있는 당신의 구두를 한번 봐라. 13살 때 엄마가 신으라고 사다준 것을 늘 맘에 들어 했나. 그땐 이상했을 신발이 지금은 좋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취향은 변하고 사람은 적응한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패션 아이콘으로 사랑받는 드라프레상주가 소화하지 못하는 구두도 있을까. 그는 “흰 구두는 어렵다”고 했다. “윤이 나는 흰 공단으로 된 구두나 크림색까진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흰색은 내게도 참 어렵다. 그래도 패션이 흥미로운 건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패션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패셔니스타가 아침마다 구두를 고르는 법은 어떤 걸까.

그는 “나도 매번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본다. 많이 입어볼수록 나에게 어울리는 게 뭔지, 어떤 게 더 예쁜지 보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말을 마치려던 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재미있는 건, 패션계에서 30년 넘게 일해온 나도 자꾸 익숙한 스타일만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내 얼굴색에 맞는 스웨터 하나, 괜찮은 재킷 하나 걸치는 것, 그게 어찌 보면 내 정답이다. 여기에 스틸레토 힐 하나쯤 신으면 어떨까. 하하.”

강승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