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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소·중공서 활발한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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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문제점…이용범
엄연히 우리한국사의 일부이면서 방치된채 미로에 갇혀있는 발해사. 발해사연구에 대한 관심은 높아가고 있으나 우선 사료빈곤에 허덕이는 국내학계와는 달리 최근 소련·중공등에선 잇달은 유적발굴과 꾸준한 연구결과로·발해사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있다. 이들 소련·중공학계의 연구현황은 어떠하며 이들의 연구가 갖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최신 자료를 입수·분석한 이용범교수의 글을 통해 그 전모를 살펴본다.
당의 칙천무후 성력년간(698∼699년)에 건국하여 후당천성원년(926년)계단에 멸망할때까지 15대 약2백30년간 현재의 만주 동북부에서 연해주 및 한반도의 동북부를 차지, 번영한 웅대한 왕국으로서 그 이름을 떨쳤던 발해왕국. 발해의 국사는 동양사에서 가장 이론이 많기로 널리 알려진 분야다. 「해동의 성국」으로 불렸던 바와는 달리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적혀 전하는 기록이라고는 현재 전혀 찾아볼수 없는 까닭이다.
고작 신·구 양 「당서」 의 발해부이나 「당회요」, 발해왕국을 멸망시킨 계단제국의 정사인「요사」와일본에 내왕한 사신들이 남긴 시나 발해 국서같은 것을 긁어모아 이 거대한 왕국의 역사를 엮으려니 흡사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어 그 거구의 전모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음은 어쩔수없는 일이다.
발해 왕국에 관한 사료로서 가장 실록에 충실한 「구당서」 발해전에 건국자인 대작영의 출생이 고(구)여 별종으로 되어 있어, 이승휴는 「제왕은기」 에서 이를 고구려의 연장으로 보고 한국사의 체계에 넣었던 것이나 그것이 곧 우리나라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서거정의「동국통감」에서도 정통왕조 신라에 대립하는 적국으로서 발해왕국이 적혀있다.
발해왕국을 다시 우리나라의 역사체계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한것은 유득공의 「발해고」이래 허미해·홍석주·한진서·정약용·서상우등 정조이후의 많은 학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발해사연구도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19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에 반하여 제정러시아와 혁명후의 소련및 일본, 그리고 1950년대부터의 중공에서의 연구는 눈부신바가 있다.
1916년에 일본학자조희일이 발표한「발해사고」는 현재까지도 발해사연구의 명저로 그 학적생명이 이어지고 있으나 특히 일본이 만주를 강점한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발해사연구는 정책적인 필요에 따라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다.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도 그들의 동진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발전한 것이었다.
즉 동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 가 동진을 강행해 흑룡강입구까지 그 손을 뻗쳤던 1852년, 「고르스키」 는 발해왕국을 포주사에 있어서의 황금시대라면서 발해사에 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후 1860년 노청북경조약으로 하룻밤 사이에 발해왕국의 솔빈부를 포함하는 연해주를 삼킨후부터의 러시아 학자들의 발해사연구는 눈에 띄게 활기를 보였다. 「파라디·카파로프」는 한·중·일3국의 자료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분야까지 연구, 188l년 남우스리 지방에서 영고탑부근의 도성·유적이 모두 발해시대의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제정러시아의 발해사연구는 「슈베레프」 「붓세」 「포즈드네프」 「그레벤시치코프」 「파토프」 「알세니예프」 등이 연구성과를 발표한바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읽을길이 없을뿐 아니라 현재의 학문적 수준에서는 고전적인 가치밖에 없는것 같다.
혁명후 소련에서의 발해사 연구논문으로서 비교적 손쉽게 입수할수 있는것은 1963년 「샤브크노프」 가 저술한 「발해국과 연해주에서의 발해관계 유적」 이라는2백30면 분량의 저서와, 1965년 캐나다의 터론토대학 기관지를 통해 발표된「말갈족과 발해왕국」 이라는 학술논문같은 것이있다.
「오크라도니코프」가 이끄는 극동고고학 조사대가 연해주일대에 산재해있는 발해유적에서 발굴한 발해불상, 사지의 와당 치미 (무미) 등은 고구려의 영향이 뚜렷하여 연해주남부인 지금의 니코리스크, 즉 발해왕국의 솔빈부도 고구려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은 유물이 증명해주고 있다.
「오크라도니코프」는 「말갈과 발해왕국」에서「샤브크노프」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발해가 문화면에서 고구려·신라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왕국의 주체는 고구려가 아니고 속말말갈이라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사를 덧붙이고 있다.
소련인학자들의 이같은 이상한 논리는 바로 발해왕국의 솔빈부를 영토로 점유하고 있는 그들로서 발해사를 지방사의 연구라는 차원에서 보고, 이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서 한국사와 연관시키는 것보다는 이미 역사에서 없어진 말갈족과 연관시키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는 정략적인 의도도 그 큰 이유의 하나인 것으로 느껴진다.
한편 중공에서의 발해사 연구를 살며보면 여러가지 의미에서 문제가 많은 『포주원류고』 의 「발해부족」, 장순의 「길림통지」, 왕세기의 「영안현지」같은 고전적인 발해사연구와 l935년 김육불에 의하여 편찬된 「발해국지장편」 (전20권)등으로 여러번 거듭 언급된바 있다.
발해왕국의 심장부인 목단강과 두포강전유역을 중공이 지배한 직후인 1949빈.길림성 돈화현륙정산 고분군에서 정혜공주묘가 발굴되었다. 발해왕국 제3대왕 대흠무(문왕)의 차녀묘라는 사실이 출토된 묘비해독으로 판명되었다.
염만장의「발해 정혜공주 묘비의 연구와 김육구의 「발해 정혜공주 묘비연구에 대한 보충」이란 논문이 「고고학보」 (l956년제2기) 에 발표되자 우리나라에도 곧 알려져 소개된바 있다.
그후 중공학자물의 발해유적조사 발굴은 계속돼 왕승등·곽문패·진현창등의 보고서가 속속발표되면서 발해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같은 중공학자들의 발굴에서 특기할점은 1980년 발남의 중경 현덕부인 화룡현 서고성자에서있었던 대흠무의 제4여 정효공주묘 발굴의 성과다. 「문물천지」(1981년 제2기)에「연변발견 발해 정효공주묘와 벽화」에 간략히 소개된데 이어 다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박물관이 집필한 「발해 정효공주묘 발굴정리간보」 (「사회과학전선」 1982년 제1기)가 발표되어 이 발굴이 발해사 연구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완전히 남아있는 묘비와 묘안의 벽화는 사료빈곤에 허덕이고있는 발해사연구의 보배임에 틀림없다.
중공이 보여준 이같은 발해사연구에 대한 정열이 결코 학문적 만족을 충족시키려는데 있는것이 아니고 『중국의 한족을 주체로 삼는 각민족사책』 (왕승비「돈화륙정산 발해묘 발굴기」)인 것이기에 중국사의 연장 또는 지엽의 일부로서의 연구인 점은 앞에서 말한바 자국 지방사로서의 소련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한민족 학자들과 연봉대학의 한족학자 사이에 발해왕국의 주체세력에 관한 견해에서 적지않은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고 알려진데는 바로 이런 점에 그 원인이있다. <필자=건국대교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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