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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조(彭祖)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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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꽃 피자 바람 불고 달이 차자 구름 낀다.'(花開風以誤 月圓雲以違)

조선 숙종 시절 선비 정지흡(丁志翕)의 시 한 구절이다. 곱디고운 꽃이 활짝 폈나 싶더니 어느새 바람이 불어 낙화(落花)하는 모습, 그게 바로 사람의 생이 아니고 무엇이랴. 인생은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선비는 노래했다.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도 "세상살이는 꿈 한번 크게 꾼 것과 같다(處世若大夢)"고 했다. 이들의 시는 물론 철학적이다. 삶의 지혜를 체득했기에 인생이 덧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 시절 백성의 인생은 실제로 허무했다. 목숨이 너무 짧아 세상의 이치를 터득할 겨를이 없었다.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20세 정도였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 27명의 평균수명이 47세였으니 백성의 목숨은 오죽 짧았겠는가.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예부터 일흔 살을 산다는 건 드문 일이다)'란 말은 그대로 진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수정돼야 할 형편이다. 유엔이 최근 펴낸 '주요 국가 평균수명 추이' 자료를 보자. 한국 국민의 올해 평균수명은 77.9세다. 선진국 평균(76.2세)보다 높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처음 측정했던 1926년(33.7세)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5년 뒤인 2020년에는 평균수명이 81세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땐 한국이 일본(84.7세)에 이어 세계 2위의 장수국이 된다고 한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고 있다. 팽조(彭祖.중국 요임금 시절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처럼 장수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옛날엔 오래 산다는 게 오복(五福)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있으면 도둑)란 말이 현실화한 시대에 장수한다는 걸 마냥 복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그 나이에 직장을 떠나면 남은 20~40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정부엔 무슨 대책이 있는 걸까. 우린 또 어떤가. 남녀든, 노소든 인생을 '이모작'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꽃이 진다고 바람만 탓할 순 없으니 말이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

*** 바로잡습니다

8월 11일자 27면 '분수대'란의 제목과 글 가운데 '팽조'의 한자 '烹調'는 '彭祖'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