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상추를 솎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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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꾼 지 삼년만에 처음으로 상추를 솎아봅니다. 손가락만하게 자란 싹을 뽑으려니 상추에게 미안합니다. 싹을 틔우기 위해 온 힘을 다했겠지요. 어디 상추뿐이겠습니까? 가늠을 하지 못해 배게 뿌린 채소가 모두 그 모양입니다.

싹이 트지 않을까 씨가 못미더워 남보다 씨를 많이 뿌렸습니다. 종묘상에서 씨를 사지 않고 씨를 받아 뿌리면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말, 이웃에서 무시로 들은 터라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삼년 동안 제 손으로 받은 씨, 참 많습니다. 많아도 이웃에게 나눠주지 못했지요. 혹시라도 남의 농사 망칠까 봐서요.

서툰 눈이지만 채소 싹만 보아도 되겠다 안 되겠다 알만 합니다. 제 깜냥으로는 솎아주는 게 채소나 기르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싶고요. 촘촘히 자란 상추, 뿌린 씨 하나도 나지 않은 게 없어 보입니다. 제가 받은 씨, 이젠 믿겠습니다. 씨를 믿으니 내년부터는 무작정 많이 뿌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솎아내느라 마음 안 아파도 될 테고요. 이렇게 사람으로 사는 요령을 조금씩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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