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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할린교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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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15해방 후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39만명은 물론 공동묘지의 일본인무덤까지 일본으로 이장해갔읍니다. 그러나 일제가 끌어간 우리 한국인 6만여명은 국제미아로 버려져 한 세대를 살았읍니다.
일본은 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 전후처리가 모두 끝났다는 입장만 내세우며 자신들이 끌어다 버린 한국인문제는 외면하고 있으니 이게 문명한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동토(동토)의 사할린에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 35년만인 79년6월 일본을 거쳐 극적으로 귀환한 서하석씨(65·부산시 동래구 수안동135)는 지금도 고국에의 귀환을 호소하며 망향에 젖어있는 사할린 동포들을 생각할 땐 『눈물이 앞선다』고 목이 멨다.

<데려갈 땐 "일본인">
일제말 이른바 「산업전사」라는 미명으로 강제 징용돼 사할린에 끌려갔던 한국인은 줄잡아 15만명. 이 가운데 약 10만명이 1∼2년간의 강제노역 후 한국으로 귀환했으나 4만여명은 사할린에서 일제패망을 맞았다. 일본항복과 더불어 사할린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47년12월말 조사결과 사할린 안의 한국인은 4만3천명.
37년이 지난 현재는 이들 1세 외에 2세와 3세까지 모두 6만명 이상 한국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말기에는 한국인의 징용인력마저 바닥나 어린 소년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노소구별 없이 마구잡이로 끌어갔었지요.』
44년4월 27세의 장정으로 강제징용된 서씨는 그때 함께 끌려간 1천명의 징용노무자 중 20∼30대의 청장년은 불과 2백∼3백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14∼15세의 청소년과 50∼6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육로로 북해도를 거쳐 l개월만에 사할린 남부 코르사코프에 도착했다.
영하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탄광이나 일본해군의 비행장 건설공사에 동원돼 짐승처럼 일했다.
절망적인 허기와 하루 15∼18시간의 중노동이 계속되는 나날. 희망이라면 어서 징용이 끝나 고향에 가는 것 뿐이었다.
『당초 6개월만 일하면 고향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읍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1년을 더 연기한다고 일방적인 통고를 하더군요.
노역을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단식투쟁을 벌였지요. 놈들은 나이 어린 노역자들을 회유, 배불리 밥도 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대신 밀정노릇을 시켰어요. 누가 노역거부에 앞장서는가를 일러바치게 해 마구잡이로 몽둥이찜질을 했읍니다. 죽지않기 위해 일을 해야 했읍니다. 배가 고파 꽁꽁 언 감자를 훔쳐 허기를 채우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목숨이나마 부지하자고 모두들 이를 악물었지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왔다. 그러나 패전국이 된 일본은 자신들이 끌어다 놓은 한국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사할린을 떠났다.
『우리가 사할린에 끌려갈 때는 창씨개명을 시켜 모두 일본이름을 쓰고 있었읍니다. 법적으로 일본인이었던 셈이지요. 그때까지 내선일체라고 떠들던 일본은 한국인들은 이제 「한국인은 일본인이 아니다」며 자기들끼리만 가고만 것입니다.』
「국제 미아」가 돼버린 동포들은 어쩔수 없이 『먹을 것을 주고 일을 시켜달라』고 소련군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비행장 건설 투입>
사할린의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를 비롯해 철도·비행장·탄광지대·군함·임산지·농산물집산지 등 20개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 노동으로 목숨을 잇고 망향의 세월을 보내게 됐다.
더러는 소련여인이나 일본여인과 결혼, 2세를 낳고 그 2세가 다시 국제결혼해 3세를 낳는 등 이질적인 가족이 늘어나는 가운데 이미 억류동포 1세들은 60∼80대의 고령이 됐다.
서씨의 경우 일본인부인 사또·노부꼬씨와 25년전에 결혼, 슬하에 1남3녀를 두고 살다 69년4월 사또 부인의 친정에서 일본적십자사를 통해 귀환을 교섭, 일본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다론 귀환자들에게 모두 주는 생활보호혜택을 유독 서씨에게만은 제외시켰다.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나는 한국인이라는 겁니다. 일본국민이라고 끌어갈 때는 언제고 한국인이라고 내버릴 때는 언제입니까. 이게 일본이란 나라입니다.
10년동안 하루 3천엔의 날품팔이를 해가며 일본외무성을 내집 드나들듯 하며 싸웠읍니다. 대답은 전후처리문제는 한일국교정상화 때 이미 끝났다는 거예요.
주일한국대사관에도 수없이 찾아갔으나 법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수용할 단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냉대하더군요.』
결국 서씨는 사또 부인과 이혼하고 79년6월 홀홀단신으로 귀국했다.
일본정부는 74년 사할린억류 한국인 송환교섭을 추진하기 위해 귀국희망자의 실태조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국제여론을 무마하려는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일본정부가 사할린억류 동포들의 송환교섭을 지연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송환자 인수방법에 한일간 의견차이가 있기 때문.
당초 한국정부는 사할린억류 동포들이 전쟁중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된 점을 지적, 『귀환희망자 전원을 일본정부가 인수한 다음 그들 자신이 일본 또는 한국에서 거주지를 자유로이 선택, 정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데 비해 일본측은 『귀환자 전원을 한국정부가인수할 것을 보장해야 소련과 송환교섭을 본격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그후 한일간에 『귀환자 전원을 한국측이 인수한 다음 한국 안 정착희망자는 한국에 남고 일본 정착희망자는 일본측이 적당한 방법에 의해 받아들인다』는 선에서 절충이 계속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본 정착희망자의 법적 지위문제 등 때문에 답보상태에 있다.
일본 동경에 있는 「사할린 억류귀환 한국인회」(회장 박노학)와 한국의 「중소 이산가족회」(회장 이두훈)등 민간단체에서 75년5월25일 「사할린 잔류자 귀환청구 재판실행위원회」를 구성, 일본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말뿐인 송환교섭>
백목박씨 등 양심적인 일본변호사 등 20명의 변호인단이 속죄의 무료변론을 맡아 지난 6월24일까지 동경지방재판소 민사3부 심리로 36회 공판을 끝냈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이 법정투쟁도 국제적인 여론환기 외에 실질적인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
『사할린 억류동포의 국내 연고자만도 50만명 이상입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을 원수로 보고 있읍니다.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에 이미 「배상」을 했다고 하지만 사람을 어떻게 돈으로 보상합니까. 일본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중소 이산가족회 이 회장은 우리 정부당국이나 사회가 동토에 미아로 남은 9만 동포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구=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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