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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화재 반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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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5년 비준 교환된 한일 협정서에는 한국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일본 안의 민간소장 한국문화재는 일본정부가 반환을 적극 권장한다는 메모랜덤(외교각서)이 명문화돼 있읍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당국은 이같은 각서정신과는 정반대로 몇해 전 한국문화재 수장으로 유명한 아따까(안택) 컬렉션의 소장품 방지문제가 제기됐을 때 한국에의 반환이나 판매를 권장하기는커녕 해외반출을 용인할 수 없다는 강경한 거부반응을 보였읍니다.』

<"반환 못한다" 잡아떼>
일제에 수탈당한 수만점의 문화재 반환을 위해 한일회담 문화재부문 대표로 활약했던 황수영 동국대 총장(64)―.
일제수탈의 한국문화재 반환문제는 아직도 근본협약정신과는 달리 굴절된 미해결의 장들이 산적한 한일국교정상화 17년사에서 민족적 이해가 가장 첨예하게 엇갈리는 분야의 하나로 남아있다.
안중근 의사가 자서전에서 『일제의 침략이 선대의 백골에까지 이르렀다』고 통탄했던 일제의 한국문화재 약탈―.
『이또·히로부미(이등박문) 통감이 일본천황에게 선물로 바친 고려청자만도 1백여점이 넘었다는 일본의 기록이 있지요.
한국인이 그처럼 신성시하는 선조의 무덤을 마구 파헤쳐 온갖 문화재를 도굴케 한 관·민간의 일제문화재 수탈은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읍니다.』
황 총장은 한맺힌 일제의 한국문화재 수탈에 얽힌 숱한 일화들의 회상에 눈시울을 적시며 일본 안 한국 문화재들의 1차적 기초학술조사와 정부 및 민간차원의 거족적인 반환운동전개를 촉구했다.
일제하의 한국문화재 민간인 수탈자로 유명한 오구라(소창) 대구 남선전기주식회사 사장은 도굴꾼들을 사주, 경주일대의 탑과 고분을 마구 파헤치게 해 귀중한 문화재들을 수집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는 것.
일본 안 한국문화재 수장가의 제l인자가 된 오구라는 소위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민간문화재단을 설립, 국보급을 포함한 수천점의 문화재를 소장해오다 사망하자 최근 후손들이 소장품 일체를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일본은 근래 고려 불화전, 한국 금동불 전람회, 고려자기 전시회 등을 열어 한국 안에는 한점도 없는 개인이나 사찰소장의 귀중한 과거 약탈 한국문화재를 공개하기도 했다.
일본의 한국문화재 3대 약탈경로는 고려말 왜침, 임진왜란, 일제침략 등―.
『고려자기는 현재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습니다. 일본의 고려자기는 명치이전까지만 해도 10점 이내였는데 소화연간에 이르러 수만점을 넘었다는 게 일인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죠.』

<귀국 때 선물용으로>
황 총장은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의 90%이상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후 자행됐으며 특히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일제침략초기의 무법시대(1905∼1915년)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는 분석이다.
임란까지의 문화재약탈은 현재 한국소장(용인 호암미술관의 일본구입 고려불화 2점 제외) 은 한점도 없는 일본 안의 고려불화 1백여점을 비롯, 범종·회화 등이 대종을 이루었다.
원래 그릇과 골동수장을 좋아하는 일인들이 일으킨 임란을 일본 안에서는 일명 한국의 도자기를 탐낸 「도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제이전까지는 한국에선 수장품을 꺼내기 위해 옛무덤을 판 일이 전혀 없읍니다. 일제가 시작되면서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한 게 한국인을 앞세운 도굴문화재 장사로 일확천금을 꿈꾼 고물상들이었읍니다.』
서울·부산·대구 등지에 자리를 잡은 일인 고물상들은 한국인을 매수, 산간벽지까지 샅샅이 뒤지며 도굴과 회유 등의 방법으로 문화재를 수집해다 팔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서울∼신의주간 철도부설공사 중 개성지역의 고분에서 고려청자가 쏟아져 나오자『한국의 고분은 보물의 처녀림』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한국인을 앞세운 본격적인 도굴을 자행, 관·민 모두가 골동수집에 혈안이 됐다.
황 총장은 어릴 때 고향인 개성에서 백주에 선대의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들을 꾸짖으려고 올라간 주민들에게 도굴작업을 엄호하는 일본헌병들이 총을 쏴댔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고 현장조사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같은 방법으로 창령∼낙동강유역, 경주, 공주, 부여, 개성, 평양일대의 고분 수만개를 도굴했다.
고려청자의 경우 일제 도굴이전의 전세품은 한국 안에 한점도 없었다는 것.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이전에 이미 동경에서 한국으로부터 을사조약이후 도굴, 반출해간 고려자기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던 기록이 있다.
관을 대표한 한국문화재의 수집가는 이등박문―.
그는 서울 충무로 일대의 일인고물상에 자주 들러 아예 선반째 전량 사들이기도 했고 일본에 갈 때는 수백점의 도자기를 가져가 「선물」로 풀어주고 왔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이 왕가박물관과 현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전형필씨 등이 수집을 했지만 일본인들의 수탈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1908년8월 창경궁에서 문을 연 이 왕가박물관의 개관식장을 잠시 우울하게 했던 일화 한 토막―.
고종황제(당시는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퇴위해 있었음)가 진열된 고려청자를 보고 『저 푸른 그릇들이 무엇이냐』고 이또 통감에게 물었다. 이또는 『저 그릇들은 천하에 명기입니다』고 자랑했다.
고종이 다시 『어디에 있던 그릇들이냐』고 묻자 이또는 무덤에서 파낸 것이라면 고종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는 것이다.
헌병 엄호속에 한국인을 앞세운 도굴로 수탈을 자행한 일본인들의 한국문화재 수장은 2차대전후 방매까지 벌어져 한국문화재 소장으로 유명한 아따까 컬렉션 같은 신흥재벌들의 대거 매입 같은 일도 있었다.
현재 일본 안의 한국문화재는 7만점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당시부터 유명한 민간소장의 하나인 이찌다(시전차낭) 소장의 경우 『도제착관남자입상』 『순금제이식』등을 비롯, 수백점의 귀중한 한국문화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품목만 4천점>
이밖에 동경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국·공립박물관과 사찰·개인 소장의 금관·금동관·금검·순금제이식·고려자기·이조자기·이조회화 등 국보급에 속하는 문화재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당시 한국측이 목록을 작성, 반환을 요구했던 공공기관 소장의 중요 문화재는 4천4백79점.
이중 『금제태환이식』 『금제경식』 『사명대사집』 『백사선생집』 『청자발』과 이등박문이 선물로 바쳤던 황실소장의 고려자기 등 1천3백여점이 66년5월 반환됐고, 회담기간 중 반환약속이 됐던 일제총독부가 발굴, 동경박물관으로 반출했던 창령출토유물 1백6점이 돌아왔다.
반환된 문화재 중에는 한국에 돌아와 국보로 지정된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과 통일신라『녹유골호』및 보물지청의 조선조 헌종 때의 『측우기』등도 있다.
황 총장은 『한일간의 문화재문제 미해결은 우선 회수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기초적인 학술조사와 기증, 매입 등을 통한 막후의 반환운동도 적극 펼쳐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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