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체제와 완전히 결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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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경에서 1일 개막되는 제12차 중공당 전국대표회의(12전대회)는 30여년간 중공당을 지배해왔던 당 주석 고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에 종지부를 찍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중국본토를 장악하기 4년전인 지난 1945년 모가 수립한 당 조직구조와 결별, 당 서기국의 역할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공당이 지난 1921년7월 상해에서 창건된 후 초기에는 중공당원들은 그들의 제한된 당원 수를 늘리려고 애썼기 때문에 주로 도시지역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켜 왔었다.
지방농민들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지난 1925년의 4전대회 때였으나 이보다 3년후인 1927년의 5전대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농부들이 진정한 혁명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시골태생인 모가 무명의 일개 공산주의자에서 급격히 부상, 유소기 등과 더불어 자신을 농민혁명의 수호자로 선언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들은 국공합작의 지속을 바랐던 당시의 당 중앙위원장 진독수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그 4개월 후 진은 장개석의 국민당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데 뒤이어 국공합작이 깨어지자 당 중앙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중공역사가들이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있는 1928년의 6전대회는 창당이래의 당의 기록을 정리, 요약하는 작업을 벌였다.
아마도 안보상의 이유로, 그리고 소련과 중공당간의 밀접한 관계를 과시키 위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6전대회는 새로운 혁명계획의 기초를 촉구함과 동시에 도시무산계급의 지휘아래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단합해야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모는 1927년말께 농부들의 무장봉기인 이른바 「추수폭동」이 실패로 끝난 뒤 비판을 받았으나 곧 복권되어 당 중앙위원에 임명됐다.
모가 중국공산혁명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l945년의 7전대회다. 모는 즉각 당 규칙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당 조직변경을 위한 모택동의 견해가 처음으로 암시된 것도 이때였다. 당 총서기직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 주석직이 신설됐다. 모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당 주석직을 맡게 되었으며 이때의 당 구조는 오늘날까지 계속 동일한 상태를 유지해왔다.
집권후 대회로서는 사상 첫번째 전당대회인 지난 1956년의 8전대회는 중공의 경제력을 증강시키고 「대약진」을 준비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원래 1961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9전대회는 문화혁명으로 인한 정국혼란으로 1969년에 개최됐다.
이때 모의 후계자로 공식지명된 임표가 국가주석, 유소기 및 그의 지지자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임의 당시보고서를 9전대회에 제출, (1967년에 끝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계속 추구해나갈 것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임은 7l년에 모를 암살하려다 실패, 소련으로 도주하려다 자살했다.
2년뒤에 열린 10전대회는 수상 주은래와 그의 정책이 일대 승리를 거둔 전당대회였다.
그러나 모는 그의 후계자 선정문제를 미결로 남겨둔 채 반은퇴생활에 들어갔다.
지난 60년대중 박해를 받았던 등소평은 복권되었으나 40세도 채 안된 왕홍문이 돌연 10전대회에서 크게 부상, 당 제2부 주석에 임명됐다.
모의 미망인 강청이 이끈 이른바 「4인방」의 한사람인 왕은 76년 가을 다른 3명과 함께 체포되어 81년1월 종신금고형에 처해졌다.
지난 77년8월에 개최된 11전대회는 문화혁명을 깨끗이 청산하고 모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한 화국봉을 새로운 당 주석으로 확인했다.
8전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공지도층은 중공을 경제대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경제정책의 역점을 농업·공업·국방 및 기술과학 등 4개 부문의 현대화계획에 두었다.
두번째로 지난 76년에 숙청됐던 등소평은 또다시 복권되어 당 부주석에 임명됐다.
【북경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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