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부정사건|회계원의 회계감사서 적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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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탁은행 부정대출은 대통령의 채찍질을 받은 회계원이 적발한 사건이다.
이대통령은 49년12월 초대 심계원장 명제세씨를 함태영씨로 교체했다. 당시 정부는 현재의 감사원기능을 양분해 부정적발을 맡는 감찰위원회와 회계감사를 맡는 회계원을 따로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인보씨를 위원장으로 한 감찰위원회는 정부수립 반년사이 조봉암농림·임영신상공등의 예산전용을 고발해 장관직에서 물려나게 하는 등 공무원에겐 두려운 기관이었다. 그에 반해 회계원은 정부수립 후 1년이 지나도록 부정정례는 들춰내지 않았다. 이 무렵 대통령은 『감찰위원회는 정보만으로 성급히 문제삼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경솔한 일 처리가 많고 회계원은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불평했다.
초대 명실계원장은 일제 때 물산 장려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도운 실업인 출신. 그는 성격상 온건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이렇듯 두감사기관에 불만이던 대통령은 구한말의 검사로 그의 기억에<강직한 경찰관>으로 인상 지어져 있던 함태영씨를 심계원장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함원장에게 공무원 비리감독을 철저히 해주도록 각별히 당부했다.
함원장은 취임하자마자 검사관 진용을 개편, 보강해 정부 각 부처에 대한 합계감사를 일제히 실시했다. 이때 문제된 것이 내무부 부정사건과 신탁은행의 부정대출이다.
내무부의 부정사건은 호구조사부용지 제작을 수의계약으로 특정업자에게 맡겨 국고손실을 가져 왔다는 것.
▲조사기록=내무부는 호구조사부5만책을 만들면서 공개경쟁입찰을 하지 않고 조일 인쇄소의 강모등 3인에게 책당 5백74원31전씩에 하청을 주었다. 그런데 이들 3인은 호구조사부를 제작할 시설과 능력이 없어 이를 모두 공성사 한정수에게 책당 3백30원에 재 하강을 주어 그 차액을 하청을 알선한 브로커 백모 등과 나누어 가짐으로써 국고에 8백91만5천5백원의 손실을 끼쳤다.
내무부는 다시 호구조사부 2차분 2만책을 만들때도 1차때와 같이 대영사 이모에게 수의계약으로 책당 6백34원6건씩에 하청을 주어 3백56만6천2백원의 국고손실을 끼쳤다. 특히 내무부 관계관은1차때 제작을 맡은 공성사의 재작현장에 나가 그 공정과 단가를 알고 있었음에도 업자에게 부당이득을 보도록 한 것이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김효석씨, 차관은 장경근씨. 심계원은 뇌물수수에 대한 확증은 잡지 못했지만 이러한 국고손실은 장·차관 선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대통령의 처리는 단호했다.50년2월 김내무가 백성욱씨로 교체되고 3월에는 장경근차관도 해임된 것이다.
당시 심계원비서실장이던 함동욱씨(71)의 회고.
『당시 심계원의 회계감사에선 각부처가 모두 크고 각은 질책이나 비위가 있었는데 이중 치명적인 것이 내무부였습니다. 내무부관계보고서를 올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경무대에서 담당검사관을 들여보내라는 연락이 왔읍니다. 담당이던 권령태검사관과 함께 경무대로 깠습니다. 대통령이 집무실로 부르더군요. 대톰령은 권검사관을 향해 심계원에서 올린 보고서를 흔들어 보이며 <이건 자네가 검사했나>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고 했더니<이거 틀림은 없는 거냐>고 해요.그래 또 <그렇습니다>고 했더니<알았어, 돌아가게> 그 뿐이었어요.그런데 며칠 뒤에 장관이 바뀌고 얼마 뒤엔 차관을 내보냅디다. 이 때문인지 뒷날 장경근씨 때문에 심계원 직원들이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습니다 」
내무부 부정으로 장·차관 교체를 즉시 단행했던 대통령이 신탁은행부정대출사건은 국회에서까지 정치문제가 됐음에도 극비내사를 하도록 한것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허정 교통장관으로 대표되던 8·8구락부와 윤치영 그룹의 국민당파의 반목이 엿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신탁은행부정대출은 조사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관계자의 기억으로 확인된 것은 교통부와 관계된 두 가지의 대출이 문제의 초점이었다는 것.
당시의 교통부장관 허정, 신탁은행 두취 (당시는 은행장을 이렇게 불렀다) 오위영씨는 8·8구락부의 맴버. 특히 오씨는 8·8구락부의 자금책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이런 8·8구락부와 경쟁관계를 가진 것이 윤치영·임영신·이순용씨 등으로 이어지는 국민당 그룹이다.
이들 두 세력은 ,모두 대통령의 측근 그룹이었지만 8·8구락부가 토착세력인 한민당 출신으로 국내기반이 강한 반면 후자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해외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두 그룹은 첫 조각때 틈이 벌어진 이래 줄곧 경쟁관계였다. 그리고 신탁은행사건은 국민당그룹이 8·8구락부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의 흔적이 엿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때를 같이해 일어난 정치공작대사건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이해하기 의해서는 그 무렵의 경치세력변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50년 들어 싼값은 계속 폭등, 가마당 1천4백원 하던 것이 1주일사이에 2천원대로 급등하는 추세여서 대통령은 양곡매점매석을 반역도매로 규정, 그 색출에 경찰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럴때 민국당은 경부의 민생문제해결 실패 등 실정을 이유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어 대롱령에게 도전했다. 그 무렵 민국당은 대항세력이던 소강파의 몰락으로 국희를 지배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대통령의 원내세력으로 태동된 대한국민당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열세였다. 그런데 개헌문체가 제기되면서 국민당은 개헌반대세력의 중심체로서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대롱령, 그리고 대통령의 환외세력인 애국단체연합회와 국민회의 지원에 힘임은 국민당은 『개헌추진세력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로서 재2의 푸락치사건을 다시 연출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마침 선거가 임박한 때여서 많은 무소속의원들이 여망인 국민당에 참여해 사실상 제2의 창당을 맞이했다.
이리하여 개헌안을 표결하게된 3월 국민당은 원내 기세를 확보해 민국당을 1석 앞지른 제1당으로 올라섰고 개헌저지에 성공했다. 이때부터 국민당의 중심이던 윤치영·임영신 그룹은 대통령의 친위대로서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경무대비서실과 내각을 지배했다. 이런 위세가 배경이 되어 그들은 힙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 그리고 민국당의 전신인 한민당 출신 대롱령 측근 그룹인 세칭8·8구락부가 그들의 공격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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