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207. 박찬호, 시인보다 무사가 돼야 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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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시(詩)가 화제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된 뒤 자신의 홈 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제목은 '벌은 여전히 꽃을 찾아다닌다'.

'산은 산 물은 물/여전히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한결같은 마음들이 날 바라보니/이놈 또한 한결같이 살아간다.

어딜 가든 한결같은 마음 있으니/이놈 잘 붙들고 나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어떤 일에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귀인이라 했고/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라 했지

평상심 찾고 나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으니/넘치는 자신감 조금 절제하여/진정하고 진정한 나 자신 만들어/멋지게 야구 하며 살고 싶어라

내일은 다시 해가 뜨지/나도 내일 다시 던진다/오늘밤 달님은 유난히 내게 밝은 미소 주네/고마운 마음으로 달님 보고 미소지으며 깊이 잠든다'.

텍사스든 샌디에이고든 어떠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결같이 공을 던지겠다는 다짐이다. 트레이드가 결정된 직후, 그는 상기됐었다. 시즌 중 팀을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잘한 결정이냐"고 주변에 많이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잘됐다"고 대답했고, 그때부터 마음이 가라앉고, 확신이 섰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정리된 마음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가 평소에 좌우명처럼 생각하는 성철 큰스님의 글 '산은 산 물은 물'이 빠지지 않았다.

박찬호답다. 생각이 많고, 감상적인 그다. 간혹 운동선수라기보다 문학청년 같은 느낌도 든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책도 많이 읽고, 대학 때부터 일기를 써오고 있는 그다.

박찬호에겐 다른 면도 있다. 무사(武士)의 면이다. 그가 쓰는 글러브 가운데 하나에는 "나는 사자(獅子)다"라고 써 있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제왕으로 살아남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메이저리그는 엄청난 정글이다. 많은 경쟁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린다. 방심하거나 게으르면 곧바로 잡아먹힌다"라고 그 치열한 경쟁의 장(場)을 표현한다. 그래서 마운드에서 글러브를 한번 쳐다보고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글러브에 그렇게 적었다고 한다. 그럴 때는 1999년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경기 도중 상대선수에게 발차기까지 하며 몸싸움을 벌였던 공격적인 박찬호가 떠오른다.

시인 박찬호와 무사 박찬호. 시인은 감상적이고 우아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반면 무사는 단순해 보이고, 저돌적이며 강한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박찬호에게 필요한 자세는 시인보다는 무사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100승을 올린 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직 싸워 이겨야 될 상대가 많고, 타자를 막아내는 게 아니라 타자를 향해 패기를 앞세워 달려들어야 하기에.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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