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37년의 새로운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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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의 광복절은 그 어느 해 보다도 각별한 감회를 갖게된다. 그것은 37년 전 벅찬 민족적 감격의 재현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 절실한 오늘의 우리 현실을 둘러보는 우리의 새삼스러운 심정이다.
바로 우리의 근세사에 절망과 암흑을 던져주었던 일본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는가.
그들로부터 한마디 사과, 『불행했던 과거를 깊이 반성한다』는 그 말 한마디로 우리의 우방이 되었던 일본은 오늘 우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지난여름은 그 어느 여름보다도 뜨겁고 지루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은 비단 우리만의 분노를 샀던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중국대륙으로, 다시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규탄하고 매도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세계의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어두운 역사와 그 상처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증언이요, 양심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그런 양식 있는 성토와 분노에 대한 일본의 응답은 차라리 또 하나의 모욕일 뿐이었다. 외교사령과 값싼 제스처는 그들의 성의와 진실성을 나타내기엔 너무도 불성실한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역설 같지만 새롭게 얻은 것이 많다. 우리를 가장 존경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며, 남을 두렵게 하는 것은 천마디 말보다는 하나의 힘이라는 사실이다.
「일제」와 「일본」에 대한 우리의 불쾌감과 분노와 배신감은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광복37년을 맞는 「성인」이 되었다. 대인의 풍모를 보여주어 어색할 것이 없다. 우리는 일본의 근본에 도전해 극복하는 원천적인 저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지엽말절의 문제에 흥분하는 감정은 자제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국가적 일표를 보다 웅대하게 세워 실천하는 일이다.
이것은 감정의 발산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또 쉬운 일도 아니다.
국민적 분발과 자기정체의 확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우리의 민족적 과제이기도 하다
힘은 주먹만이 힘이 아니다. 정신이 없는 주먹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적 활기와 의지를 모아 자존·자강의 정신적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민족적 단결」이란 말은 과거의 이지러진 정치장황 속에서 식상한 구호가 되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참된 뜻을 되찾아야할 때다.
우리 민족이 일찍이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단결했다면 적어도 오늘과 같은 장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11년 전 우리가 남북대화를 제의했을 때 북한이 민족적 양심으로 그것에 응했던들 대는 늦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아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욱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평범함, 그러나 선택의 여기자 없는 지상명령이다.
눈을 들이켜 37년 전 8월15일, 우리민족이 품었던 그 순간의 일체감, 그 감동, 그 포망의 열화를 오늘의 맥락에 이을 수 있었다면 조국의 모습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를 보는 일본의 눈도 또한 오늘의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의 오만과 사시를 견디어 내는 길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의연한 자세와 마음가짐에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경제인에게만 요구할 어깨너머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의무이다.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기업인은 기업인대로,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일본을 극복하는 자기 나름의 사명과 성실성이 요구된다. 그런 노력이 모든 분야에서 결집되면 그것이 바로 민족적 에너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일본은 최근의 역사자료서 왜곡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금 그런 자각과 자기분발의 모티베이션을 찾게 했다.
어느 민족이나 불행한 역사는 있는 법이며 그 불행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민족의 위대성이 달려있다.
우리는 과거 불행의 역사를 이겨냈으며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이겨낼 저력이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전화를 딛고 일어선 우리의 오늘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역경 속에서도 경제건설의 맥박을 늦추지 않는 우리의 의지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동안 일본을 알고 일본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그것은 하나도, 둘도 국력의 신장을 서두르는 일이다.
세계는 아직 힘이 지배한다. 아무리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도 민족간, 국가간의 갈등을 극복할만한 세계정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히 나타나지 앉을지도 모른다. 결국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지탱하는 것은 힘이며 그것은 곧 국력이다.
일본의 국력이 37년 전의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면 과연 그들이 패전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려했을까.
무엇보다 앞서 경제를 번영시키고 군사력을 튼튼히 기르는 것이 최선의 국력이다. 그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바로 국민의 의지다. 국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해도 그것을 힘으로 기르려는 국민의지가 박약할 때는 국력이 배양되지 못한다.
일본을 보자. 어디 그 나라가 크고 자원이 풍부한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국민의지는 민족적 자각에서 비롯된다. 슬기 있는 민족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부딪치면 한데 뭉치는 법이다.
일본의 오만이 우리의 민족적 자각을 촉발시켰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도전을 받는 민족이 발전을 이룩하게 되며 이제 그 길은 우리에게 열려있다.
안일과 무분별로 시간을 허송하지 말자. 미래의 어느 순간에 또다시 타민족의 우롱을 받지 않으려면 지금이 순간부터 노력하자.
그 동안 우리가 일본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감정적 차원의 배일은 빨리 벗어나야 한다. 또 그 동안의 선린관계로 우리가 일본을 가까운 우방의 하나로 생각한 것도 사실이나 이제 분별없는 편향도 지양해야 한다.
광복절은 이제 열기도, 각성도 없는 흐리멍텅한 날 일수는 없다. 아마 우리의 후배들이 생각하는 광복절은 휴일 이상의 의미가 없었을 것도 같다. 바로 이런 안이한 역사무감각의 자세야말로 스스로 경계해야할 일이다.
오직 민족적 자각을 통한 우리의 결의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국력의 배양을 통한 민족자전의 길을 찾는 것이 광복 37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엄숙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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