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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와 애국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국이 기울어 갈 제/정기를 세우신 이여/역사의 파도 위에/산같이 우뚝한 이여/해 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 보도다.
서울 남산공원에 선 안중근 의사 동상록이다.
우리가 안 의사를 영웅으로 모시는 것을 제일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최근에 발견됐다. 물론 일본인, 이름은「마쓰노」(송양행태), 직책은 일본 국토청장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장관인지, 또 일본 국토청이 뭘 하는 곳인지는 모르나 최근 그의 역할은 한가지 점에서 눈부시다. 왜곡 일본교과서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에「불을 지르는」일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이등박문 공을 원흉이라고 부르고 그 암살자를 영웅으로 취급하는 외국의 교과서도 있다. 그래도 그 나라의 교육방침이라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 외국은 한국이고 암살자는 안중근 의사.
이쯤 되면 일본교과서가 왜 왜곡됐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장관이라는 위치의 사람들이 역사를 얼마나 비뚤게 보고있는지 일본교과서의 왜곡은 차라리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안중근은 왜 이등박문을 저격해야만 했는가. l909년 여순법정에서 그는 이등박문의 죄상을 15가지로 요약, 답변했다. 1895년의 민비 시해, 고종 폐위 등을 열거하고『한국 안에 있는 산림, 광산, 철도, 어업,농·상·공업 등을 모조리 강탈』했다고 규탄했다.
『한국 학교의 서책도 모두 불태우고 내외국 신문을 못보게 한 일』,『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 의사들과 그 가족들까지 10여만명을 죽인 일』도 들었다.
특히『한국이 일본에 속방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일』을 지적한 것은 바로 일본인의 폐부를 찌른 말이다.「침략」을「진출」로 고친 동기가『당시의 한국 사정도 있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이 인식은 극소수의 친일분자를 조종, 한국 스스로가 일본의 속방이 되려고 했다는 선전의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의거나 합방 뒤에 일어난 치열한 독립운동은 과연 우리가 일본의 속방이 되고싶어 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일본이 안 의사를 영웅으로 취급하는 우리 교과서에 이의를 단다면 (지금처럼 완곡한 표현으로나마) 다시 역사는 70년 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사전까지 고치는 것이 어떨까. 무력항쟁은「암살」로, 평화항쟁은「폭동」으로.
과연 일본의 교과서왜곡이나 안 의사에 대한「불만」이 2000년대 어느 날을 1910년대로 돌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안 의사의 지적대로『동양 평화를 깨뜨려 몇억만 인종으로 하여금 장차 멸망을 못 면하게 한 일』이 재현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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