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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毒樹)의 열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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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37년 12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

수사기관이 술 밀매꾼의 전화 도청 내용을 근거로 기소한 나르돈 사건에서 법원은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의 심판대에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수사기관이 문제의 도청 내용을 단서로 수사를 벌인 뒤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법원은 이 증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위법한 방법의 직접 사용을 금지하면서 간접 사용에는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면 이는 윤리적 기준에 어긋나고 개인의 자유를 파괴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독수(毒樹)의 과실(果實)'(Fruit of the Poisonous Tree)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판결이었다. 독이 있는 나무에 열린 열매에도 독이 들었다는 뜻이다.

이는 위법.탈법을 통해 얻은 사실(독수)은 증거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한 파생 증거(과실)도 배제해야 한다는 미 연방대법원 판례로 확립됐다. 오늘날 이 판례는 형사사건의 판결 잣대가 됐다.

80년의 어느 날 독일 잡지 슈피겔에는 정부 기밀과 관련된 글이 실렸다. 수사기관은 한 언론인을 기밀 유출자로 지목하고 용의선상에 올렸다. 법원의 영장을 받아 도청에 나선 수사기관은 이 언론인이 자신의 누이 집에 기밀 문건을 숨긴 사실을 밝혀냈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이 문건의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문건이 독수의 과실이었기 때문이다.

불법 도청한 대화에서 얻은 증거, 영장 없이 체포한 피의자의 자백에 의한 증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압수한 서류를 통해 수집한 증거 등이 대표적인 독수의 과실에 해당된다.

검찰이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 사건'에서 독수의 과실 원리를 들고 나왔다. 불법행위의 부산물인 도청 내용을 수사해도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이다. 법원도 이 같은 증거를 무시함으로써 탈법적 수사관행을 차단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독이 든 열매는 자극적이다. 국가의 권력 남용이라는 독수를 제거하지 않은 채 그 열매의 유혹에만 빠지면 법적 안정성은 크게 흔들린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