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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골목 「런던」주영 4년반동안 느낀 노제국의 명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영국식 온고이지신
매주 금요일 상오 7시가 되면 런던교부근 버몬지의 빈터에는 새벽장이 선다.
1천평 가량되는 공지에 널빤지를 얽어서 만든 임시노검이 수백개나 들어서고 곳곳에 가스등이 켜진다.
이 새벽장의 특이한 점은 파는 물건들이 모두 골동품이라는 점이다.
도자기·조각·그림·고가구 등 「골동품」이란 용어가 상식적으로 연상되는 물건들이 모두 진열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외국인의 눈에 신기한 것은 그 밖에 오래된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빅토리아조의 유리변, 오래된 단추인형, 2차대전때 쓰던 철모, 시효가 지난 계약문서 등 그야말로 없는게 없다.
값도 2, 3백원에서 수십만원까지 폭이 넓다.
그래서 근무일의 새벽시간인데도 이 장터는 언제나 초만원이다.
공식으로 영국에서 골동품이라면 만든지 1백년이 넘는 물건을 뜻한다.
이것이 영국세관의 허가없이 수출할 수 없는 골동품의 기준이다.
그러나 60년대이래 중산층이 급격히 불어남에 따라 골동품이 대중화하면서 골동품의 「연령」은 크게 젊어졌고 골동품 취미도 특수층의 전유물에서 서민충의 기호로 대중화됐다.
새벽장은 아니지만 런던에는 이밖에도 「포토벨로」「킹스로드」「캠든」등 거대한 골동품 시장이 여러개 있다.
전국적으로 등록된 골동품 상점도 7천개나 있다.
그래서 읍정도의 도시치고 골동품 상점 한두군데 없는 곳이 없다.
이처럼 폭넓은 저변을 바탕으로 런던에는 소더비·크리스티·필립스 등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골동품 경매소가 성업중이다.
다른 모든 산업이 외국에 뒤지고 있어도 골동품 업계서만은 아직도 영국회사들이 석권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골동품계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게 된데는 세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영국에서는 노르만 정복이래 외침을 받지 않아 전외를 입은적이 없고 혁명과 같은 사회변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옛 물건이 파괴될 계기가 별로 없었다.
둘째, 영국인이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확보하면서 부지런히 남의 유물들을 본국으로 가져와 골동품을 축적시켰다는 점이다.
대영 박물관에 쌓아놓은 수백구의 이집트 미이라나 집을 통째로 뜯어다 놓은 그리스의 대리석신전과 중간 유물을 보면 이들의 토색질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세째는 영국인들의 옛것을 아낄 줄 아는 보수성합이다.
잉카제국의 금 공예품들을 약탈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걸 모두 녹여서 금괴를 만들어 버린것에 비하면 약탈한 전리품을 그대로 보전하면서 그것을 연구하고 학문적 체계를 세워놓은 영국인의 공적은 과소평가가 어렵다.
영국의 한 고적 전문가는 남의 문화재를 약탈해온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행적을 비난하는데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오토만 제국이 아테네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파르테논 곤전을 화약고로 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게 폭발하면서 보석 같은 그 대리석 신전이 파괴되었어요. 우리는 남의 문화재를 파괴하지는 않았습니다.』
식민시대의 문화재 약탈은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논쟁거리로 남는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방치해 놓았더라면 지금 정도로 보존될 수 있었겠느냐는 영국인들의 주장을 자기변명 정도로만 일축할수도 없을 것 같다.
옛것을 아끼는 영국인의 성향은 생활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마다 발표되는 예산안의 상징은 대장상이 예산교서를 담고 의회로 가져갈 때 쓰는 낡은 가축 가방이다.
l백년이 넘은 이 가방은 가죽이면서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데도 새것으로 바꾸지 않고 있다.
이 예산가방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통근열차를 타면 신사들이 들고있는 가방들이 모두 그렇게 낡은 것들이다.
옷은 최고급으로 입고 있으면서도 가방은 이가 안 맞아 끈으로 매고 다니는 사람이 흔하다.
마치 한국의 고등학생이 관록을 표시하기 위해 새모자를 찢고 꿰매어 쓰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길거리의 우체통도 수십번 페인트질을 해서 더덕더덕해진 1차 대전때 것과 최근에 만든 「현대식」우체통이 같이 서있고 동전도 화폐를 십진법으로 개혁한 이전 것과 이후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영국경제의 낙후성을 개탄하는 한 영국인은 그 원인이 혁신을 두려워하는 이런 보수성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새로운걸 받아 들일때는 언제나 의혹을 갖고 검토하고 수구의 바탕위에 접을 붙이는 식으로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영국식 온고이지신-. 이것도 쉽게 속단할 수 없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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