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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4)박순양·최신덕씨 등 고아구호·부상병위문|최례순 회장만 제외 Y식구 모두 무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전쟁이라고 하면 어느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6·25같이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한 전쟁이 일찌기 있었을까?
이 때 배운 것이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모두 다 일단 의심하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둣 의기양양하던 북괴군도 미군(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꺾이고 말았고 그 기세를몰아 신의주까지 갔지만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다시 쫓겨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때문에 도시와 거리, 집들이 모두 망가져 있어 그것을 어떻게 복구해야할지 궁리하고 있는데 다시 쫓겨나가야 하는 골이 되고 말았다.
6·25동안 YWCA는 회장 최비순씨가 납치되고 간사로 있던 염철순씨가 혼자 남아 명동회관을 돌보았다. 서류를 보관하기 위해 독에다 넣어 땅을 파고 묻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물이 들어가 엉망이 되었다. 박순양씨가 궁금해서 10월 3일에 나가보니 염철순씨가 젖어서 엉겨붙은 서류를 하나하나 떼어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양씨는 그해 5월에 이대 음대(피아노 전공)을 졸업하고 기독교 방송국에 취직했는데 한달이 못되어 6·25가 터지는 바람에 집에 숨어 있다가 YWCA 명동회관이 궁금하여 나갔던 것이다.
YWCA는 학생때 가끔 회의때면 가서 피아노 반주도하며 드나들기도 했고, 회장 최례순씨는 이모가 되고, 고문총무인 박「에스더」씨는 고모가 되는 사이였다. 고모 박「에스터」씨는 미국으로 갔지만 간것만 알지 그후 전혀 소식을 모르니 궁금하고, 이모 최수순씨는 납치되었으니 어쨌든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였고 궁금해서 가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궁금해서 들른 발길이 그의 심혈을 기울이게 한 사업의 터전이 될 줄이야.
이렇게 해서 그에겐 떼려야 뗄수 없는 YWCA가 되었고 YWCA는 귀중한 한 일꾼을 얻게된 기이한 인연이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염철순씨를 도와 사무실 정리를 해주었고 한국 보육원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YWCA일원으로 파송되어 고아들을 씻기는 일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이 일은 이가 많은 전쟁 고아들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 새 옷을 갈아 입히는 것인데, 대단히 고달픈 일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1·4후퇴때까지 YWCA는 구호사업을주로 했다. 학생부 간사였던 최신덕씨(성악가 이유선씨 부인이며 제13대 서울YWCA회강)가 나와 학생 Y회원들을 소집하여 군병원을 방문하고 간호하는 일도 돕고 위로도 해주었다.
부상병은 날로 늘어가고 일손은 모자라는 때 학생들의 자발적인 봉사 활동은 Y의 정신아래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6·25동안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지만 제8대 회장 김애마씨는 당시 이화여대부총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학교를 움직이는데 중심 인물이었다. 총장 김활난박사는 밖의 일을 많이 하고 의국 출입이 잦았던 때라 교내의 사소한 일은 주로 김애마씨가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김활난박사가 6월 28일 수원으로 내려가고 괴뢰군은 보위부에 김애마부총장을 잡아다가 김활난씨 있는 데를 대라고 하여 3일간 고초를 겪다 풀려났다. 그후 인천 근처 어느 농가에 숨어 농군 부인으로 가장하고 3개월간 지냈다. 9·28수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습은 검게 탄 얼굴에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당시 미국에 유학가 있던 김정옥씨는 이모 김활난박사의 학살 소식을 듣고 까무러치는 소동을 벌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뉴스는 오보였다. 그때 김씨는 이모를 위해 상복을 입기까지 했는데 8월중 어느날 TV뉴스에서 이모를 보고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날로 그는 상복을 벗어버렸다.
대개 남자들은 마루의 널판지를 몇장 뜯어내고 그 밑에 숨어 있던이가 많았다. 부인들은 옷을 보따리에 싸 농촌에 가지고 가서 한줌 보리나 밀을 바꾸어다가 가족들의 식량을 했고 옷의 밑천이 다드러나면 자봉틀을 이고 가서 식량을 바꾸어다 먹었다.
YWCA식구들은 최단순회장 외에는 희생된 이가 없이 누구나 다 굉장히 고생했을뿐 하나 둘 명동회관에 찾아들게 되었다.
그래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기적을 감사하면서 그 동안의 피나는 고생-특히 초조와 불안속에 지내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산에 일시 정부와 함께 갔던 박「마리아」씨와 김활난박사도 다시 돌아와 11월 11일 실행위원회를 열고 임원개선을 했다. 박「마리아」씨가 회장이 되고 김신실씨가 대리총무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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