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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마이너스 땐 이미 늦어 … 소비 늘릴 카드 미리 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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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80년대 엔고 거품이 본격적으로 꺼지기 시작한 91년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였다. 92~93년엔 2년 연속 1%대를 기록했다. 80년대 부동산값 폭등으로 신음했던 일본 소비자는 반색했다. 물가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가가 0%대에서 마이너스 상승률로 곤두박질했어도 일본 정부나 국민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유권자인 소비자 입장에선 당장 나쁠 게 없었기 때문이다.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이 대대적인 경기 부양책을 내놓다가도 96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정부가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올리는 ‘냉탕’ 정책으로 돌아선 것도 이런 안이한 시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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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선언한 건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난 2001년 3월이었다. 2년 연속 물가가 하락해야 디플레이션으로 본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기준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사태를 방관하다 디플레이션을 방어할 ‘골든 타임’을 놓쳤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아시아금융학회장)는 “한국은 20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일본의 뒤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우리나라의 상황은 일본의 물가상승률이 0%대에 들어서기 직전인 93년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24개월째 1%대로 기고 있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앞으로도 저공비행을 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국제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저유가는 석유류 가격 자체에도 영향을 준다. 여기에 석유를 쓰는 중후장대 산업부터 기름을 연료로 작물을 키우는 농수산업까지 산업 전반의 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낸다. 농수산물은 최근 이렇다 할 풍수해도 없어 가격이 하락세다. 석유나 원자재, 농수산물이 싸게 공급되고 있다는 얘기다.

 수요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물가 하락 압력이 거세다. 석유류와 농산물을 뺀 근원물가지수마저 올 9월 이후 1%대로 떨어졌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현 단계의 문제는 내수 부진에 따라 수요 쪽에서 물가상승 압력이 너무 낮아졌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소비를 왕성하게 하지 않으니 물건값이 오를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면서 기업의 이익이 줄고 가계 소득도 늘지 않으니 소비가 위축되고 있다. 여기에다 고령화에 따른 노후 대비로 소비자들이 쉽게 돈을 쓸 수 없는 구조가 됐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2년째 1%대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것은 사실상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공식적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이때는 이미 디플레이션이 굳어진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일본의 예를 보듯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구나 디플레이션 진입 단계엔 제품 가격이 내리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선 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더욱이 물가가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심리가 퍼지면 소비자들은 구매를 계속 늦추게 되고, 생산과 기업활동이 위축돼 경제 전반이 늪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근태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에선 90년 초·중반의 저물가 상황을 한때 가격이 싸진다는 이유로 ‘좋은 디플레이션’이라고 좋아한 적이 있다”며 “우리도 자칫 잘못 판단하면 일본처럼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교수는 “아직은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아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라는 등의 논쟁은 한가한 이야기다. 지금은 논쟁만 할 때가 아니다. 소비와 투자 감소, 경기 침체가 고착화하지 않도록 한은이 금리 인하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써야 한다. 정부도 가계가 소비를 늘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배·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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