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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망령」버리지 못한 증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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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동경=신성순 특파원】일본 군국주의 침략사를 왜곡하는 교과서 검정에 한국·미국·중공·소련 등 국제적으로 비난이 집중되자「오가와」(소천평이)일본 문부상과「마쓰노」(송야행태)국토청 장관은 교과서 검정이 내정문제이며 교과서내용에 잘못이 없다고 오히려 반발함으로써 내외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마쓰노」는『한국이 한일합방을 침략이라고 하고 있으나 어느 쪽이 정당한지는 알 수 없으며 이를 조사해야 할 것』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앉고 있다. 이 같은「마쓰노」의 발언은 53년「구보다」(구보전태일랑)망언이나 65년「다까스기」(고삼진일)망언, 65년「다나까」(전중각영)망언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 내에 군국주의의 망령이 끊이지 않고 고개를 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구보다」망언은 한일교섭 일본측 수석대표였던「구보다」가 53년 제3차 청구권 회의에서『총독정치로 한국에 철도도 건설되고 산림녹화도 되는 등 한국이 덕을 많이 보았다』는 발언을 해서 전체국민의 분노를 샀던 사건이었다.
「구보다」망언이 한국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켜 한일교섭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제7차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였던「다까스기」는 다시『한국이 식민지, 식민지하지만 일본은 한국에 좋은 일을 했다. 좋은 일을 하려는 노력이 전쟁에 지는 바람에 헛수고가 됐다』고 멀쩡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해 다시 말썽을 빚었다.
이어 74년 당시 수상이던「다나까」는 국회답변에서『한국이 오랜 합병시대를 통해 김의 재배방법이나 의무교육제도를 배웠으며 이처럼 경제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이 더 소중하게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더라』는 말을 해 역시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다.
「다나까」의 망언은 제2의「구보다」망언으로 한국사회에서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같은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잇단 망언은 이들의 의식 속에 아직 이웃을 깔보는 마음과 과거 아시아에 군림하던 군국시대의 환상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마쓰노」는 이번 문제가 된 교과서 검정과 직접 관계가 없는 각료다.
그런 그가 한일 합방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교과서 검정을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일본 정부내부의 분위기에 아직도 과거 한반도·중국대륙·동남아를 침략하여 인명·재산을 약탈하고 태평양전쟁이라는 참극을 일으킨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를 잘한 것으로 2세들에게 가르쳐 같은 범죄를 되풀이시키겠다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이며 따라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으로 우리가 본 피해가 얼마나 켰다는 것은 일본의 다음 세대에게 정확하게 가르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 한일양국이 앞으로 선린으로써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면 다음세대도 과거의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그 기초 위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의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 나라와의 관계도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얘기다.
일본이 진심으로 한국과의 우호협력관계의 구축을 바란다면 잘못된 교과서는 바르게 시정돼야 하며 이것은 일본의 내정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가 옳다고 보아야한다.
뿐만 아니라 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1910년 8월 22일 이전에 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은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 것은 한일합방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불법적인 것이었음을 시인하고 소급해서 이를 무효로 하겠다는 춰지다.
조약으로 한일합방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한 일본이 이제 와서 한일합방의 징당성을 운위하고 강제노동을 시키기 위해 한국인을 일본으로 끌고 간 것이 징용령에 의한 합법적인 행위라든가 3·1운동을 폭동으로 규정, 그 내용을 교과서에 실리도록 한 것은 논리상으로도 모순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같은 차원에서도 교과서 검정문제는 일본의 내정문제로만 그칠 수는 없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한다.
24일자 중공의 신화사 통신은 인민일보를 인용,「오가와」일본 문부상의「내정발언」에 대해『교과서 검정은 내정일지 모르나 중국이나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내정이 아니다』고 지적하고『일본에 이런 말을 하는 인물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도 22일 일본 교과서에 대한 비판에 가담했다고 일본의 동경신문이 24일 보도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이 기사에서 일본문부성이 히로시마(광도)와 나가사끼(장기)등 일본의 피해만 강조하고 외국에 해를 끼친 데 대해서는 입을 씻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일본교과서는 일본군이 2차 대전 중 중국·동남아·태평양제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침공한 것으로 역사에 대한 개념을 바꿔치기하고 있으며 독일나치에 대해서는 침략이란 말을 쓰면서 일본군에 대해서만 이 말을 삭제하도록 일본 정부가 요구하고 있다고 야유 섞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 신문은, 또 최근 일본영화가 전쟁을 미화하던가 그렇지 앉은 경우 전쟁에서 일본인이 당한 비장한 면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 영국의 비평을 인용하면서 일본의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60%가 넘는 현재 과거의 역사가 이들에게 왜곡 선전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교육계 인사들마저도 교과서 검정문제는 앞으로 일본의 대외관계수립에 바탕이 되는 문제인 만큼 이제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도록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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