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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화요일] 줄어드는 과학의 성차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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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는 지난 5일 온라인판에 똑같은 내용의 사고(社告)를 실었다. 생명과학·의학 분야 연구 신뢰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들을 포함한 30여 개 저명 저널이 새 논문 게재 원칙에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는 연구자에게 실험 동물의 성별(性別) 정보를 밝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 하원의 짐 쿠퍼(민주당), 신시아 루미스(공화당) 의원은 지난 6월 ‘모두를 위한 연구(Research for All)’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미 정부가 지원·심의하는 모든 연구에 성별 분석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과학기술계에 ‘젠더(gender)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남녀의 역할·규범 차이를 가리킨다. 생물학적 의미의 성별(sex)과는 다른 개념이다. 과학계의 젠더 혁신운동은 성·젠더 두 개념을 다 포괄한다. 정확한 성별 분석을 통해 연구 성과를 높이고 기술을 혁신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과학기술은 흔히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한데 왜 꼭 성별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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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스탠퍼드대 론다 슈빙어(과학사)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1997~2000년 미국에서는 총 10종의 의약품이 판매 중지됐다. 이 중 8종이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을 일으켰다. 폐고혈압을 유발해 퇴출당한 식욕억제제 폰디민(펜플루라민)과 리덕스(덱스펜플루라민)가 대표적이다. 미 회계감사원(GAO)은 2001년 조사 보고서에서 “남녀의 생리적 차이로 특정 약물 성분에 여성이 더 취약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게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남성만 생각하고 만든 약들이 여성에게 문제를 일으켰다는 얘기다.

 실제로 생명과학·의학 분야 동물 실험 때 암·수컷을 다 사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 한 종류, 그중에서도 수컷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생리학·약리학·내분비학 분야의 경우 수컷 사용 비율이 높다. 과학자들이 암컷 실험을 기피하는 이유는 발정 주기 때 호르몬이 변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값도 수컷보다 비싸다. 문제는 성별이 실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연구에서조차 암컷 사용률이 낮아 결과적으로 연구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골다공증은 흔히 폐경기 여성들이 많이 걸리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10년쯤 일찍(평균 65세) 발병하고, 같은 나이일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골다공증 골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골절상을 입은 환자가 다시 골절을 당할 위험은 남성이 여성보다 세 배 이상 높다. 골절사고로 인한 사망률도 남성이 여성보다 높다. 그런데도 ‘정상’ 골밀도 판단 기준이 되는 표본은 오랫동안 ‘젊은 여성’이었다. 남성 표본은 97년에야 마련됐다.

 이런 ‘젠더 불균형’은 공학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여성의 음성 주파수는 남성보다 높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약 90㎐, 중국어 사용자는 약 10㎐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80년대까지만 해도 텍스트-음성 변환장치(TTS·text-to-speech)는 남성 음성만 연구해 만들어졌다. 그 탓에 여성의 음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꿀 때 나오는 기계 합성음도 남자 목소리뿐이었다. 그 탓에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젊은 여성들이 TTS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다. “초창기 TTS를 개발한 연구원 대부분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쓰이는 인체모형도 과거에는 남자형뿐이었다(위 사진). 그 탓에 동일한 교통사고를 당할 때 여성이 더 큰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야 여성형이 개발돼 쓰이고 있다. [중앙포토]

 안전과 직결된 자동차 안전벨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은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1999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둘 다 안전벨트를 매고 같은 속도로 달리다 사고를 당했을 땐, 여성의 부상률이 47%나 높았다. 차량 충돌실험 때 사용된 인체 모델이 미국 남성 평균 50%의 키와 몸무게를 기준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남성보다 키가 작고 몸무게가 덜 나가는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컸던 셈이다. 미 정부는 2000년 미국 인구의 5%에 속하는 여성 신체를 본 딴 모형을 사용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슈빙어 교수는 2009년 이런 문제를 처음 지적한 뒤 미 과학재단(NSF)·EU집행위원회(EC)의 지원을 받아 연구 범위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국내 과학계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의 문미옥 실장은 “과거 과학계 양성평등 운동은 여성 과학자의 숫자를 늘리고(fix the number) 연구기관의 채용·승진 시스템을 바꾸는 데(fix the institution) 주력했다. 반면에 이젠 편향된 과학지식을 고치기 위해(fix the knowledge)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한국연구재단(NSF)도 힘을 보태고 있다. 내년 8월 26~28일 WISET와 공동으로 ‘젠더 서밋’을 한국에서 개최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학자 500~60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KAIST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다.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김소영 교수는 “미국에서 ‘모두를 위한 연구’ 법안이 통과되면 과학기술 분야의 ‘무역장벽’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도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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