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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방주가 만난 사람] “전통 도검 제작은 숙명 … 무령왕릉 칼 재현에 14개월 정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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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10면

홍석현 환도장이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긴 칼 ‘양수도’의 날을 살펴보고 있다. 양수도는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던 칼로도 유명하다. [사진 프리랜서 이순재]

환도장(環刀匠) 홍석현(59) 한국전통도검제작소 대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도검 제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환도장’ 홍석현 한국전통도검제작소 대표

경기도 일산의 개인 공방인 한국전통도검제작소를 찾은 12일. 그의 작업대 위에는 대나무를 칼집으로 사용하는 죽장도(竹杖刀) 재료가 놓여 있고, 옆에 작은 종잇조각이 눈에 띄었다. 서울시에서 배달돼 온 ‘서울시 무형문화재 신청 심사 결과’를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심의 결과-신청인이 칼을 잘 만들고 재현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인정되나, 기술의 역사성 등을 검증하기 어려워 부결함’. 필자의 눈을 의심했다.

칼집·금속장식 등 모두 직접 만들어
그 유명한 도검 제작 장인이 ‘노 타이틀?’. 그랬다. 홍 환도장은 지금까지 국가 또는 지자체 공인 ‘명장’ ‘무형문화재’ 등의 타이틀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타이틀이 없다고 해서 그의 기능이 낮다거나 명성이 부풀려졌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공방을 둘러보고, 홍 환도장이 걸어온 길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본 필자로서는 지자체 포함 국가 공인 타이틀 부여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홍 환도장은 196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방에 취직해 15년간 목공예와 금속공예의 기능을 몸에 익혔다. 그 이후 1983년부터 도검에 심취해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전통 도검의 재현과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전통 도검 제작의 핵심인 칼날의 제조 외에 칼집, 칼날 위 상감 입사, 각종 금속 장식 제작은 그가 도검에 입문하기 전에 익혔던 목공예와 금속공예 기능이 톡톡히 한 몫했다. 책가방이 들려 있어야 할 어린 나이에 그의 손에는 대패와 금속공예 공구가 들려 있었고, 도검에 매료된 뒤에는 쇠 벼르기, 칼집 만들기 등으로 하루 해가 저무는지 모르고 도검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도검류 소지 허가제가 되면서 전통 환도 수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환도 제작의 맥도 끊길 뻔했다. 홍 환도장은 1983년 이후 경찰청의 도검 제작 허가 1호였던 도검장 고(故) 전용하 선생, 사인검 등 환도 제작 장인인 고(故) 유적선 선생, 도검 장인인 고(故) 임명길 선생 등을 찾아다니며 환도 제작의 비기를 전수받았다.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만의 전통 환도 제조 기법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홍 환도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쇠의 색깔만 보고 화두에서 꺼내 모루에서 두드리질을 해야 할 때인지 아닌지를 아는 데만도 1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가 독보적인 전통 도검 기능 보유자로 자리잡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등 전통 도검의 수요가 많았을 때는 칼날과 연마, 칼집, 금속 장식 제작 등이 분업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과정을 홍 환도장 혼자 해낸다. 분업으로 할 만큼 일감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다가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검도 도장에서 사용하는 칼도 중국의 값싼 제품이 밀려드는 상황이다.

공주박물관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어
그러나 그는 도검 제작의 맥을 잇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 도검 제작에 입문할 때는 도검의 아름다움과 푸르스름한 칼날에 매료됐고, 그 이후에는 먹고살기 위해 도검를 제작했다. 지금도 경제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제자도 세 명이 있고, 여기저기서 찾아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의 공방에는 그의 노력으로 재현해 놓은 전통 도검이 진열돼 있었다. 그중 백제 무령왕릉 용문 환두대도를 재현할 때의 일화는 그의 장인정신을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칼은 칼날 외에 칼자루와 그 끝의 아름다운 용 문양 장식, 칼집의 정밀한 금속공예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명품이다. 그는 그 칼이 소장돼 있는 공주박물관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진열장 유리 너머로 보고 또 보며 밑그림을 만들고, 도검을 완성했다. 유물을 꺼내볼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서다. 제작에만 1년2개월이 걸렸다. 그가 재현한 전통 환도는 이외에도 가야단봉문 환두대도, 이순신 장군 대환도 등 20여 점이다. 그중 조선시대 사인검은 2003년 제28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모래 속에 쇠 성분이 들어 있는 ‘사철’을 녹여 뽑은 쇳덩어리를 잘고 얇게 만든 쇳조각.

그는 최근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다. 모래처럼 작은 알갱이에 철 성분이 들어 있는 사철(沙鐵)을 녹여 직접 쇳덩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의 공방에는 국내산 사철과 외국산 사철을 담은 포대가 쌓여 있었다. 또 그 사철에서 뽑은 쇠를 얇게 만들어 놓은 쇳조각도 전시돼 있었다. 국내산 사철은 철 함량이 낮아 투입한 원료 대비 뽑아내는 철의 양이 적다. 홍 환도장은 “국산 사철을 어렵사리 구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몇 날 며칠 제련했는데 겨우 한 줌 정도의 쇠를 얻었을 때 허탈했다”며 전통의 맥을 잇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사철로 환도용 쇠를 제조하는 작업은 소형 제철소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작업으로 대단히 어려운 공정이다. 국내에서 이런 공정을 성공시킨 장인은 홍 환도장이 거의 유일하다. 비용도 많이 들고, 사철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는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정신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적인 뒷받침은 5대 국새(國璽) 제작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도정만 박사가 지원하고 있다. 홍 환도장은 사철을 이용해 칼날 제조용 쇳덩이 제조에서부터 칼날, 칼집, 금속장식 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장인이다. 그의 공방을 나서면서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을 잡으며, 환도장도 무형문화재로 대접받을 날이 하루 빨리 올 날을 상상해 봤다.


◆환도(還刀)=조선시대에 칼자루가 짧은 외날의 긴 칼을 환도라고 통칭했다. 도검은 일반적으로 긴 칼을 부르는 말이다. 주로 군인 또는 관원들이 환도를 사용했으며, 국가에서 직접 제작과 유통을 관리했다. 환도를 제작하는 장인이 환도장이다.



박방주 교수=중앙일보에서 20여 년간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09~2012년 한국과학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 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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