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성공신화에 갇혀 사는 바보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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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30면

남자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계절이다. 성공을 위해 청춘을 제물로 바친 중년들은 인생의 정점에 오른 지금, 내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도 과거를 꿈꾼다. 바쁜 일정을 쪼개 동창회에 나가는 것도 ‘내 인생 최고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다. 그런데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 단순히 추억 속 한 페이지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 건,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의 주인공들 때문이다.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972년 미국 어느 소도시. 40대 남자 4명이 스승의 집에 모였다. 조지와 필, 제임스와 톰은 20여 년 전 펜실베니아주 챔피언 게임에서 우승한 필모어 고교 농구부 멤버들.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매해 모이는 이들은 정치인, 사업가, 교사 등 저마다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톰만은 웬일인지 떠돌이 알코올중독자 신세다. 현 시장인 조지는 재선을 위해 유력 후보인 유태인 샤만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 감독과 친구들은 조지의 성공을 위해 유태인 죽이기 전략을 세우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서로를 이용가치로만 여기는 친구간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국립극단의 ‘자기응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은 미국의 극작가 제이슨 밀러의 대표작으로 72년 뉴욕드라마비평가상, 토니상 베스트상, 퓰리쳐상 등을 수상한 명작. 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미국식 성공윤리의 타락을 다룬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1949)의 계보를 잇고 있다. 공황을 극복하고 50~60년대 폭주하던 미국 경제에 다시 브레이크가 걸린 70년대 초반, 또다시 미국식 성공윤리의 치부를 들추는 ‘세일즈맨’ 손자 세대의 화끈한 고백이 흥미로운 건, 역시 잔치가 끝나버린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시선 때문이다.

이 무대를 지배하는 건 다 부서져가는 창고 같은 낡은 집에 사는 감독이다. “감독님은 영원히 사신다”는 조지의 대사처럼, 이들에게 감독은 20여 년 전 챔피언십을 선사한 정신적 지주이자 남성적 가치의 상징이다. 무대 전면에 놓인 우승 트로피는 그가 뿌리는 마약. “난 내 자신을 잃어버렸어. 내가 되고 싶었던 그 사람이 아냐”라는 나약한 고백 따윈 마약 앞에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곧 미국이다” “모두 승자를 응원하게 돼 있다” “뛰려거든 이겨라” 같은 선동과 함께 그는 미국적 성공윤리의 화신이 된다. 흡사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대공황에 좌절했던 윌리의 아들 비프가 아버지의 비극을 성공지상주의로 극복한 모양새다.

“인간의 약점을 찾아 철저히 공략하는 것. 그것이 게임의 요체”라는 논리가 팀 내부에도 적용되니 갈등이 생기지만, ‘성공신화’는 이마저도 간단히 수습한다. 정치 자금과 여자 문제로 애들처럼 싸우던 조지와 필은 각자 감독의 방으로 불려가 순한 양이 되어 나온다. ‘공공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편에 서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승리 제일주의’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문제다. ‘이기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은 증오와 파괴를 부른다. 오늘의 희생양은 제임스. 평범한 중학교 교장이지만 이번 선거를 발판으로 정치판에 진출할 것을 꿈꾸었다가 선대본부장에서 밀려나자 폭발하고 만다.

이에 반전을 시도하는 것이 알코올중독자 톰이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는 친구들을 내내 비웃던 그가 ‘우승 트로피는 훔친 것’이라며 우승 멤버 5명 중 유일하게 잠적한 마틴의 비밀을 폭로하고 나선 것. 마틴과 톰은 도둑질한 승리를 인정할 수 없기에 ‘성공신화’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이제부터. 친구들은 20년 전부터 그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각자의 이익 앞에 분열되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 부정당할 위기에 처하자 냉정을 찾는다.

그들을 뭉치게 하는 건 물론 감독이라는 이름의 성공신화다. 결승전 마지막 10초의 실황중계방송 녹음이 흘러나오자 친구들은 홀린 듯 교가를 부르며 하나가 된다. “우리의 우승은 역사야. 책에 기록돼 있어”라는 감독의 다짐에 으르렁대던 친구들도 “난 널 형제처럼 사랑해”라며 서로 얼싸안는다.

“서로 사랑해라 이놈들아, 사람은 홀로서지 못한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속해야 돼”라는 감독의 마지막 대사는 일견 지당한 명제지만,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기에 정당성을 상실한 채 다시 저들을 홀리는 주문처럼 공허하게 울린다. 암전 후 감독역 배우 박용수의 비웃음이 객석에 강렬히 내리꽂힌다. 너희도 이 다 부서진 창고 집 같은 철 지난 성공신화 속에 갇혀 우승 트로피라는 마약에 취해 훔쳐 온 챔피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으냐 물으며.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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