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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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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은행들이 돈을 꾸러 기업 문 앞에 줄을 선다? 이런 기현상이 1998년 세계 금융중심지인 영국 런던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일본 미쓰비시종합상사 런던지점 앞에 도쿄미쓰비시 등 일본계 은행들이 몰려들었다. 미쓰비시상사는 이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해 큰 재미를 봤다.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의 하나인 무디스발(發) 돌연변이였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와중에 무디스가 일본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급락시키자 조달금리가 치솟고 돈줄이 막혀 버린 것이다. 당시에도 최고 신용등급을 유지한 미쓰비시상사는 훨씬 낮은 금리로 런던 시장에서 돈을 그러모을 수 있었다. 무디스는 수백 년간 내려온 일본의 은행-기업 간의 갑-을 관계까지 한순간에 역전시켰다.

무디스는 29년 대공황 때 반석에 오른 기업이다. 멀쩡한 업체들이 줄도산했지만 무디스가 판정한 우량기업들은 모두 살아남아 이름을 떨쳤다. 망한 기업들도 무디스가 예측한 순서대로 차례로 무너져 주위를 놀라게 했다. 무디스의 정보력은 한때 미국 CIA나 러시아 KGB를 능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스위스 은행의 준비금 규모까지 정확히 파악해 칼같이 신용등급을 매길 정도였다.

무디스가 독점적 지위를 누린 것은 75년 이후의 일이다. 미국 법률상 공모펀드는 반드시 '투자적격'증권에만 투자해야 하는데, 미 증권거래소(SEC)가 무디스와 S&P, 그리고 영국계인 피치 등 3개사를 신용평가 공식창구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사라지면 저승사자의 칼도 녹스는 것일까. 아시아 금융위기와 엔론 분식회계 사건 때 무디스는 경보음을 너무 늦게 울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급기야 미 상원 청문회에까지 불려나가는 곤욕을 치렀다.

이런 무디스가 최근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을 인텔.IBM과 같은 A1으로 2단계 올렸다.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A3)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어느 기업도 그 나라의 신용등급보다 높을 수 없다는 무디스의 오랜 원칙에 비춰볼 때 이례적이다. 신용등급만 따지고 보면 나라가 망해도 삼성전자는 멀쩡하다는 이야기다. 경제 실정(失政)을 부인해온 정부로선 창피하기 그지없는 대목이다. 이러다간 재경부가 삼성전자 앞에서 돈을 꾸어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