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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 칼럼

유엔보다 탁월한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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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림픽과 유엔은 세계화의 두 모습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더 민주적이고, 더 뛰어난 형태다. 국가들이 참여하지만 개인들도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올림픽은 시민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유엔은 정치적 산물이다. 여기에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돈이 올림픽을 더럽힌다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유엔에서는 한 표, 한 표가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 몇몇 운동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유엔에서는 마약을 거래하는 국가와 무모한 도박을 감행하는 국가들이 자기 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운명까지 망치려 들고 있다.

유엔은 대만과 팔레스타인을 배제하고 있다. 올림픽에는 대만.팔레스타인은 물론 북한까지 참여한다. 유엔은 적들을 대립시키지만 올림픽은 그들을 화해시킨다. 올림픽에서는 에티오피아같은 힘 없는 나라도 금메달을 딸 수 있다. 하지만 유엔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에 의해 부활된 고대 올림픽이 어떻게 100년 만에 세계를 묶는 큰 잔치가 됐을까. 아마도 올림픽이 우리 시대의 희망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경제.외교적인 세계화는 우리를 위협하고 권태롭게 만든다. 국가 원수들의 모임보다 더 가소로운 것은 없다. 세계화로 인한 자본.제품.사람들의 이동도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유다.

그 반대편에 더 세계통합주의적인 올림픽이 있다. 여기에 누가 반대표를 던지겠는가. 스포츠가 돈 때문에 부패했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은 맞다. 그들은 유엔에서의 표 매수에 대해서도 똑같이 항의하는가.

올림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올림픽을 통해 개인.사기업 등 비정부 차원의 외교, 자유주의적인 세계화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올림픽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올림픽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건설적이고 과거 이데올로기에 구속받지 않는 세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지구촌의 비참함을 외면한다는 비난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올림픽은 지구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미국 육상 대표로 출전한 제시 오언스는 (독일 민족이 속해 있는) 아리아족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경기장을 찾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화를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언스는 다른 민족보다 독일인이 우수하다고 주장한 나치즘을 조롱한 셈이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육상 200m 경기 후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1위와 3위에 입상한 미국의 흑인 선수들이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들어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그들은 미국 내 인종 차별의 종말을 선언하고자 했다. 80년 미국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함으로써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식민지화를 비난했다. 이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했다. 이런 결과들과 유엔에서 만들어낸 가소로운 결의안을 비교해 보라.

그렇다면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은 어떨까.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요즘 민주주의 전사들을 구속하기가 조심스럽다. 올림픽을 훼손시킬 수도 있는 국제적 비난이 두려워서다. 홍콩 인권단체들은 올림픽을 인권 존중의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 민주화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지금까지 유엔이 13억 중국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결의안을 한 번이라도 채택한 적이 있었던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올림픽 그 자체는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올림픽을 사랑해야 한다. 올림픽은 희망의 '전도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소르망 문명비평가
정리=박경덕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