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병리고치겠다" 의사 치우고 40대에 법관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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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소년시절의 내 꿈은 유능한 내과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일제하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귀국 후 10년간 서울대학병원 암정 내과에서 임상연구에 종사하면서 전문의로서의 수련을 쌓기 시작했다. 현미경과 씨름하는 임상연구실은 내 꿈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45년 해방과 함께 이 땅을 휩쓴 격동과 혼란, 그리고 부패한 사회상은 내 인생에 갈림길을 만들어 주었다.
의사는 인술을 베풀어 인간의 육체적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직업인이었으나 우리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의의가 앞섰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은 의사보다『법과 양심을 바탕으로 부패한 인간사회에 메스를 가하는 법관을 더 필요로 한다』고 느꼈다고 나 할까.
이 같은 심경의 변화에 따라 해방 다음해인 46년 나는 서울대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나이는 서른 여덟. 아내와 1남5녀를 둔 가장이 만학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50년 서울대학을 졸업했다, 그 동안 두 번이나 고시에 응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고시를 포기하고 본업인 의사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나는 숱한 번 민의 방을 지새웠다.
『도중하차는 인생에 있어서의 패배』라는 자책감이나를 채찍질했다.
졸업하는 그해부터 책 보따리를 싸 들고 절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일곱 번 도전 끝에 홈런을 쳤다. 6전 7기로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내 나이는 44세. 최 고령자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후 15년 동안 서울지법 등에서 판사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으며 지난 65년 5월 정년퇴임, 변호사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전용성<71·변호사·서울 돈암동 전 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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