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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8)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46)|김영수|김기수-프레디·리틀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일호는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프로모터 겸 복서로 크게 활약했다.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부산에는 마땅한 오락이 있을 수 없어 권투경기는 수지맞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흥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해병대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어 전시 하에서 여건이 좋았다.
특히 그는 이때 백용수라는 좋은 복싱파트너를 만나 흥행에 크게 성공, 많은 돈을 벌었다. 이일호 보다 꼭 10년 아래인 백은 경남 중 출신으로 당시 부산의 최고 인기복서였다. 나이 어린 백은 시종 파고드는 파이터인 반면 이는 복서와 파이터를 겸해 우선 경기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런데다 관중마저 부산사람들은 백을, 피난민들은 이를 응원하는 등 팬이 확연히 갈라져 더욱 흥미를 끌었다. 이일호와 백용수는 부산 외에도 마산·여수·남해 등으로 원정, 51년 봄부터 53년 봄까지 무려 24차례의 라이벌 전을 벌였다.
한 달에 한 차례씩 대전을 벌인 셈인데 이가 마지막 한번만 패했을 뿐 모두 이겼는데도 관중들은 무선수의 경기에 매료되어 많이 몰려들었다. 또 기막힌 일은 이일호와 백용수의 대전은 모두 이일호 자신이 주최, 관중들의 입장료까지 그가 직접 받았으며 오픈 게임이 끝나고 메인 이벤트인 자기 차례가 오면 허겁지겁 링에 올랐다. 부산 제5육군병원 운동장에서 벌인 경기에는 2만 명 이상이 몰려들어 병원지붕 위에도 관중들이 올라가 병원이 무너질 까 봐 경기가 지연되기도 했다.
이 대전에서 이일호가 거둬들인 돈이 자그마치 백원 짜 리로 7가마가 넘었다.
이렇게 돈올 번 이일호는 피난 온 권투 인들이 모이는 부산 역 앞의 성림 다방에서 한 달에 5만∼6만원씩 차 값 외상을 갚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국제신보 고십난에 국회의원 모씨 다음으로 권투인 이 아무개가 차 값을 많이 지불한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재에 밝은 복서 이일호가 주최한 최대의 흥행은 67년 10월3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벌어진 WBA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의 2차 방어전인 미국 혹인 도전자「프래디·리틀」과의 타이틀 매치였다. 이 대전은 대전료만 김이 2만5천 달러, 「리틀」도 지명도전자여서 1만5천 달러 등 약5만 달러(당시 환율 3백대1로 약1천5백 만원)의 경비가 드는 당시로선 엄청난 흥행이었다. 그러나 프러모터에 자신이 있던 그는 엉뚱하게 장충 체육관이 아닌 야구장을 개최장소로 결정했다. 많은 관중을 동원함으로써 적자만 면하면 한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으로 이 대전을 주선했다.
사교술과 수단이 뛰어난 그는 명예대회장에 김종필 공화당의장, 대회장에 차지철 의원, 부대회장에 양정규 의원(현 KBC회장)등을 추대하는 등 수십 명의 고위인사들을 고문으로 모셔 흥행에 만전을 기했다. 당시만 해도 TV방송국에선 중계 료를 지금과 같이 많이 지불하지를 않던 때여서 이일호는 입장료(특석 3천 원, 일반석 1천5백원)만으로 경비를 꾸려 나가려 했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느라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 타이틀매치에 관심을 표명, 홍종철 공보부장관을 불러 TV에서의 중계여부를 물었다.
영문을 모르던 홍 장관은 KBS에 불호령을 내려 중계를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TV측은 사실 중계를 포기했던 것이 아니고 막판에 싼 중계 료로 중계를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이일호는 KBS에서 6백 만원이란 파격적인 중계 료를 받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TBC-TV에서도 중계에 나서 KBS의 반대를 겨우 설득, 지방네트웍이 없다는 이유로 1백50 만원의 중계 료를 받아 생각지도 않던 소득을 올렸다. 이 대전은 결국 혈전 끝에 김이 판정승으로 타이틀을 방어했으나 홈 디시전이라는 중론이었다.
이날 운동장 입장수입만 1천6백 만원을 기록해 이일호는 6백 만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등 흥행은 크게 성공했다.
대전 다음날 이일호는「리틀」에게 줄 대전료 1만5천 달러를 교환하기 위해 재무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조흥은행으로 갔으나 달러가 모자라 애를 먹었다. 또 은행측에선 그가 미덥지가 않았던지 선수와 함께 올 것을 요구해 화가 뻗친 이일호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일이 있기도 하다.
이일호는 이렇게 재미를 보자 김기수와 이탈리아의「마징기」와의 3차 방어전도 서울서 개최키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김은 이 약속을 깨고 5만5천 달러의 대전료를 언질 받자 이탈리아로 뛰어 들었다. 타이틀을 팔러 간다는 구설수 속에 김은 한차례 다운을 뺐고도 아깝게 판정패했다. 이 대전이 국내서 열렸더라면 물론 김의 승리였을 것이다. 그는 김이 약속을 어기자 서운한 듯 입맛을 다셨다. 『두 차례만 방어전을 국내에 유치해 성공하면 하나밖에 없는 세계타이틀도 오래 간직할 수 있고, 김기수 역시「마징기」에게 받은 5만5천 달러는 간단히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흥분해 한 것이다.
이일호는 이후 권투와 손을 끊고 광산업에 뛰어 들기도 했으나 실패했으며 현재 삼풍상가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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