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아시아 최고 쇼 만드는 데 인생 걸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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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의상을 입은 외국인 무용수들과 함께 선 김춘범씨(中). 임현동 기자

'쇼도 보고 밥도 먹는' 극장식 쇼. 우리나라 극장식 쇼의 원조이자 대명사로 통하는 '워커힐쇼'에 인생을 건 사람이 있다.

출연자와 스태프 60여 명을 진두지휘하며 '워커힐쇼'를 13년째 이끌고 있는 무대감독 김춘범(43)씨. 1963년 시작된 이 쇼를 거쳐간 무대감독 중 최장수다. 93년 공연된 '판타스티크'부터 이달 초 막을 올린 '오딧세이'까지 그의 손에서 태어난 대형 쇼 프로그램이 15편이나 된다.

"쇼 감독이 저의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 휴가도 주말도 없고, 야근까지 밥 먹듯 하는데 이 일이 좋지 않으면 절대 못하죠."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쇼 무대에 뛰어든 것도 특이하다. 학창시절에도 공부보다 축제 등 각종 행사 기획과 진행이 더욱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는 87년 '끼'를 살려 쉐라톤 워커힐 호텔 예능팀에 조명.음향 담당으로 입사했다. 기계.장비 담당 등을 거쳐 93년 쇼 전체를 책임지는 무대감독이 됐다.

쇼 비즈니스계에서 김씨는 본명 대신 '타이거 김'으로 불린다. 통상 6개월~1년마다 무대에 새로 올리는 프로그램을 선정하기 위해 접촉했던 외국 프로덕션 관계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딱 벌어진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빛이 만만치 않게 보였기 때문일까.

"매일 공연에서 1초의 오차도 나지 않도록 무대장치를 바꾸고 출연진의 입.퇴장을 지시하느라 뛰어다니는 모습이 사냥터의 호랑이 같았나 보죠."

한 편당 평균 수십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극장식 쇼는 라이브라는 특성 때문에 돌발 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그래선지 김씨는 위기에 대처하는 유연성과 순발력을 무대감독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자질로 꼽았다. 무용수가 무대에서 갑자기 엎어져 다치기도 하고, 음악은 흐르는데 무용수는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 등 등골이 오싹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몇년 전 매직쇼 도중 마술사가 여자 관객을 무대로 불러 올려 미리 준비해 둔 브래지어를 관객의 옷 속에서 꺼내는 듯한 연기를 한 적이 있어요. 관객들은 박장대소하며 좋아했는데 공연이 끝난 뒤 여자관객 남편이 찾아와 거칠게 항의하는 바람에 한시간 동안 싹싹 빌었죠. 땀 깨나 흘렸어요."

무대 뒤에서의 쑥쓰러운 경험도 많다고 했다. '워커힐쇼'는 78년 외국인 여자 무용수들이 상의를 벗고 춤추는 이른바 '토플리스 공연'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김씨는 "입사 직후 무대 뒤에서 진행을 돕고 있는데 옷을 거의 다 벗고 돌아다니는 무희들 때문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쩔쩔맸다"고 말했다. 요즘은 아무리 노출이 심한 출연자를 봐도 업무에 지장을 받는 일은 없단다.

김씨의 꿈은 '워커힐쇼'가 파리의 물랭루즈쇼.리도쇼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쇼처럼 아시아를 대표하는 쇼로 자리잡는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 괌.말레이시아.호주 등에서 극장식 쇼가 시작됐어요. 중국.일본.동남아 관광객의 발길을 그쪽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더욱 화려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올려야 하는 게 가장 큰 고민입니다."

신예리 기자 <shiny@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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