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수습"겨냥한「국정 대수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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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의 장여인 사건을 비롯한 그 동안의 일련의 대형사건·사고는 차원 높은 국정수술을 불가피하게 했다.
외미 도입 파문에서 시작한 사건·사고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교계일부의 성명사건, 서울 지하철사고로 연결되고 마침내 최악·최대의 사건이라 할만한 의령사건과 장 여인 사건까지 터지고 말았다.
이들 사건은 하나같이 정부와 사회의 도덕적 기반과 신뢰성을 뒤흔드는 도전적 성격이 짙었고 우리사회가 과연 건강한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사건은 단순한 사건차원이 아니라 진작부터 정치차원·시국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정치·경제·사회 등에 미치는 악영향은 물론 민심이 불안해지고 위기감이 고조된 것도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런 수렁에서, 이런 부정적이고 건강치 못한 분위기에서 벗어날「민심수습」과 「국정쇄신」차원의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국민적 기대감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대통령은 검찰발표에 앞서 먼저 민정당을 개편하고 이어 하룻밤이 지난 후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이번 개편은 단순히 내각과 당의 중요얼굴을 바꾼 행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국정쇄신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전대통령 자신의 통치방식이나 정부·여당의 국정운영방식과 자세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당·정의 개편 폭이 모두 넓고 깊다는 점에서나 이례적으로 거의 동시에 양쪽을 함께 개편한데서도 새 국정의 전개라는 전대통령의 결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개편을 포함한 이런 일련의 조치가 대형사건·사고로 빚어진 축적된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수렁」에서 탈출하기에 충분한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다. 특히「신뢰부도」라는 말로 표현되는 민심의 황폐와 사회의 병리는 단기간에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지속적이고도 장기적으로 정부의 신용을 쌓아나가는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요직의 인적구성의 면에서 이번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세칭 개혁주도 그룹의 핵심적 인물의 한사람으로 비교적「젊은 연령층」에 속했던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전 대통령 및 노태우 내무장관과 같은 육사1기 출신으로 상대적으로「장년층」에 속하는 권익현 의원이 기용된 일이다.
이는 비교적 시니어층의 역할증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목되는 대목이다.
유 총리의 유임 등을 제의하고 규모로 본다면 전체 22명의 각원 중 꼭 절반에 해당하는 11명의 교체는 내각을 새로 꾸미는 조각의 성격마저 있다. 폭이 매우 넓은 점이나 교체된 대상에서 사회관계부처가 많다는 사실은 개편의 충격효과를 크게 하고 최근의 사회분위기를 일신해보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이번 장 여인 사건의 주무부라 할 재무와 지휘감독의 입장인 부총리, 동자 등이 개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장 여인 사건관련으로는 법무장관이 물러났으나 후임에는 바로 검찰수사를 지휘한 정치근 검찰총장이 기용됨으로써 이 역시 장 여인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문책인사의 성격은 아닌것 같다.
이런 점으로 보아 전대통령은 장 여인 사건 등 특정한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책임을 묻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관련장관들은 책임지고 사태수습을 하라는 뜻이 강하며 수습능력과 책임의 상쇄여하가 문제가 될 것 같다.
과거 최규하 대통령 때 임명된 주영복 국방·이광표 문공·김용휴 총무처 장관이나 최 전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최광수 체신장관이 물러난 것은 그만큼 세월도 흘렀고 개각이 있으면 으례 바뀔 것으로 예상됐던 일이다.
경제부처에서 경제기획원·재무 등이 유임된 반면 장여인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적은 농수산과 상공이 갈렸다. 고건 농수산 장관의 퇴임은 지난번 외미 도입파문과, 서석준 상공의 퇴임은 일종의 구설수와 각각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역시 문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리에 오래 있은 장관을 주 대상으로 개각이 이뤄졌다는 인상쪽이 강하다.
바뀐 11명중 지난 1월에 임명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런대로 꽤 기간이 지난 장관이 대부분이란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새로 발탁된 장관들 중 차관 또는 지사에서 승진한 사람이 셋이고, 노총위원장이 노동장관으로, 전기통신 연 소장이 체신장관으로, 방송사장이 문공장관으로 발탁되는 등 관련분야에서 그 분야 행정책임자로 옮겨 앉은 케이스가 셋이다. 교통장관에는 예에 따라 예비역 고위장성이 들어섰고 보사장관에는 민정당 여성의원인 김정례 씨가 기용돼 각내 홍일점이 됐다.
또 이로써 민정당 출신 장관이 1명 더 늘었다. 외무차관에서 상공장관이 된 김동휘 씨의 경우 전례 없던 인사이나 수출외교와 경제의 국제화추세를 생각하면 이해되는 일이며, 김장 관은 외무부에서 또는 주이란 대사로 이 분야의 베테랑이다.
규모로는 최대지만 이번 개각은 뚜렷한 정치적 색채나 의미는 적은 편이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분위기 쇄신과 심기일전의 다짐에 더 뜻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민정당의 개편은 시국이 이지경에까지 이른데 대한 당의 정치적 책임과 비록 관련은 없다는 수사결과가 나오긴 했으나 구설수에 오른 권정달 사무총장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묻고 정국을 일신해 보자는 조치로 해석된다.
시국수습을 국정쇄신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집권당이 개편에서 제외될 수는 없는 일이며 정치차원에서 당을 개편한다면 장 여인 사건과 관련된 구설이 없었더라도 그 초점은 당연히 당의 구심이었던 권정달 총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민정당 개편의 핵심은 권총장의 후퇴와 다른 권총장의 등장이다.
민정당 창당의 주역이었고 사실상 민정당 운영의 구심이었던 권정달씨의 퇴진은 당 운영방식의 변화는 물론, 장차 당 체질의 변화까지 예상케 하는 일이다.
형식상 사무총장은 정책위의장·원내총무 등과 병렬의 위치에 있지만 실제 운영에 있어 권정달 총장은「동료중의 제1인자」라는 선 이상의 상급자의 역할을 해 왔던게 사실이다. 당 사무국을 지휘하고 조직을 담당하는 일 외에도 당 정책과 원내대책까지 다 컨트롤해온 당의 중심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런 입장의 권정달씨의 퇴진은 민정당의 거의 모든 것이 크게든 작게든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당 간부 상호간의 인간관계도 바뀌고 결과적으로 운영방식이 달라질 것이며 당의 당면목표나 역점도 변경 될 가능성이 많다.
예컨대 사무총장에 집중됐던 당의 의사결정이 보다 분산되어 간부들간에 담당분야에 대한 상대적 독립과 상호존중이 있을 것 같고 사무국의 압도적 우위체제가 다소 약화되면서 정책과 원내분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질 전망이다.
당내 민주주의가 잘 안 된다는 당의 오랜 폐단도 앞으로 간부들의「분업화」경합이 커진다면 다소 시정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 이재형 대표위원은 당내 민주주의를 활성화 할 수 있도록 당규 등에 고칠게 없는지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신임 권 총장이 당총재와 군대 동기요, 제5공화국 출범에도 깊이 참여했고 창당 전에 신당의 사무총장 물망에도 올랐던 사람이지만 권 전 총장이 민정당에서 차지했던 만큼의 위치나 역할은 맡을 여건도 아니고 그럴 구조도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개편과정을 보면 이 대표위원의 생각이 개편과 인선에 많이 반영된 것 같다. 개편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그가 먼저 했고 특히 평소 약간「거북한 관계」였던 권 전 총장의 퇴진으로 발언권이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민정당으로서는 이번 사태가 창당 후 최대의 시련이었던 셈이다. 이번 개편을 계기로 과연 과거의 생경함을 씻고 민주국가의 집권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할지 두고 볼 일이다.

<송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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