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고향 가는 철로변에 무궁화 심는 실향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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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실향민들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차창 밖에 활짝 핀 무궁화를 보면서 고향까지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임진강역에서 내려 민간인통제구역 검문소를 지나 통일대교를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통일마을. 여섯살 때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을 떠나왔다는 실향민 장동희(66)씨는 4년째 이 마을을 가로 지르는 경의선 철로 양쪽에 무궁화를 심고 있다. 군내면의 임진강 유역에서 최북단 철도역인 도라산역 입구까지 십 리를 무궁화 꽃길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언젠가는 이 꽃길이 DMZ를 지나 북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북한에 심을 꽃도 인근에 마련해 두었어요. 북한의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적응 훈련을 시키는 거죠."

무궁화 한 그루 한 그루를 심는 그의 손길엔 통일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처음 민통선 지역에 무궁화 꽃길을 만들겠다고 통일부를 찾았을 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어요. '6.15 공동선언'이후에 반응이 확 달라졌죠. 2000년 9월 허가를 받았을 땐 날아갈 듯 기뻤어요."

2002년부터 땅을 고르고 무궁화를 심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도시락 공장을 운영하며 저축했던 노후 설계자금 가운데 2400만원으로 꽃나무를 샀다. 지난해 4월엔 아예 주민등록까지 이곳으로 옮겨 꽃길 근처 5.5평 컨테이너 박스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생활비는 건물 임대업을 하는 부인이 대준다고 했다.

"몸은 힘들지만 24시간 내내 꽃길을 돌볼 수 있어 마음이 너무 편해요. 수원에 있는 아내와는 일년에 몇번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부인이 불평하지 않느냐고 묻자 "물론 반기지는 않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도와줘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씨의 일과는 오전 4시에 시작된다. 아침 일찍부터 꽃길을 가꾸기 시작해 햇볕이 따가운 한낮에는 잠시 쉬었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부터 다시 꽃길을 돌본다. 멧돼지와 노루 등 야생동물이 꽃나무를 망칠까봐 한 밤에도 편히 쉴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정성에 감복한 통일마을 주민들도 수시로 틈을 내 꽃나무를 함께 돌본다. 인근 군내초등학교 학생들이 특히 열심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외지의 자원봉사자까지 이 곳을 찾아와 일을 도와준다. 지금까지 다녀간 청소년 자원봉사자 숫자도 7000여 명에 이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통일을 기다리셨어요. 제가 하는 일이 통일을 앞당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김정윤 인턴기자, 사진=양영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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