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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별 볼 일 있는 날] 백수·양아치·재벌 … 그의 얼굴에 다 있다, 이희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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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시청률은 2~3% 수준이지만 일찌감치 눈밝은 이들을 열광시킨 드라마가 있다. 극작가 김수현과 소설가 이외수는 “근래 최고 드라마”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시인 신경림은 사석에서 “요즘은 문학의 역할을 이 드라마가 하더라”고 했다. 전직 조폭, 소매치기, 꽃뱀, 일용직 노동자, 백수 등 밑바닥 인생이 한데 모여 살며 서로를 따뜻하게 품는 JTBC 월화극 ‘유나의 거리’ 얘기다. ‘서울의 달’ ‘옥이 이모’ 등 1990년대 서민 드라마에 획을 그은 김운경 작가가 선보인 ‘21세기 신 서민동화’다. 서민공동체에 대한 강한 향수와 함께 사람 냄새 진득한 얘기를 들려준다.

 ◆당당한 서민 영웅 창만=‘유나의 거리’는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로도 화제다. 소매치기 유나 역의 김옥빈은 최근 부진을 말끔히 털어냈다. 정종준·이문식·안내상 등 조연은 물론이고 단역까지 모두 살아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희준(35)이 맡은 창만이 주변의 모든 일에 끼어들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사실 창만 역은 ‘신 스틸러(Scene Stealer·주연 못지 않게 빛나는 조연)’라 불릴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희준의 전작에 비해 평범하다. 그렇게 튀지 않는 게 딱 창만이란 캐릭터다. 계산된 연기라기보다 실제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한 이 드라마에서 진짜 이웃 청년 같은 생활연기를 소화한다.

 창만은 고아에 검정고시 출신이지만 못하는 게 없는 수퍼맨이다. 물건도 잘 고치고, 갈등도 잘 중재한다.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주눅들지 않고, 더 가지려 악착 떨지도 않는다. 이전투구 정글 같은 삶, 승자 아니면 패자, 갑 아니면 을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당당하고 선한 서민 영웅이다.

 ◆극단을 오가는 연기폭=연극으로 치면 데뷔 15년차인 그를 각인시킨 작품은 2012년 KBS 주말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다. 까칠하면서도 장난스런 재벌 2세 점장 역으로 주목을 끌었다. 오밀조밀한 꽃미남 배우와 다른 선 굵은 외모가 돋보였다. 영화나 TV단막극에서 강렬한 연기를 도맡았던 그의 말랑말랑한 로맨스도 호평받았다.

 어떤 캐릭터든 자기 색깔을 더해 자기화하는 배우와 캐릭터에 몰입해 자기를 지우고 매번 새로운 인물을 창출하는 배우를 구분한다면 이희준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형사에서 사이코패스, 양아치에서 천사표 샐러리맨까지 극단을 오갔다.

 ‘유나의 거리’와 동시에 선보인 영화 ‘해무’에서의 변신도 마찬가지다. 그가 맡은 노숙인 출신 뱃사람 창욱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탓에 끝내 악의 축으로 돌변한다. 전반부엔 웃음을, 후반부에선 공포를 자아낸다. 그 원초적인 표정이, 뼛속까지 천사표인 창만과 도저히 한 사람으로 믿기지 않더라는 평이 많았다.

 ‘해무’의 심성보 감독은 “이희준은 기괴함과 준수함을 동시에 갖춘 배우”라며 “종이 한 장 차이로 혐오감을 줄 수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캐릭터인데 뛰어난 캐릭터 분석과 연기력으로 연민을 자아냈다”고 호평했다. 함께 출연한 김윤석도 “영화계의 차기 대권주자”라고 칭찬했다.

왕년의 조폭 도끼(정종준·왼쪽)는 창만(이희준)이 세들어 사는 다세대주택의 가장 큰 어른이다. 그가 치매에 걸려 요양시설로 가게 되자 이웃들은 진짜 가족들처럼 가슴 아파한다. [사진 JTBC]

 ◆평범함, 그러나 야누스의 매력=길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평범한 외모, 그러나 선악이 공존해서 어떤 변신이든 가능하다는 것이 이희준의 매력이다. 한없이 선량한 소시민과 기괴한 사이코가 함께 있는 듯한 얼굴이다. 거기에 “연습이 부족하면, 연습하는 꿈을 꾼다”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사실 창만은 ‘유나의 거리’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모든 걸 잘하고, 모두에게 잘 해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니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다. 그는 “창만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 말도 안돼 라고 한다면 내 연기가 실패한 것,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다음주 50부 종영을 앞두고도 창만의 활약상을 더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가 많으니 실패는 아니다.

 그는 대학시절 큰 교통사고 후 방황하다 연극에 입문했다. 입술 상처도 그때 생겼다. 선배 손현주의 “초심을 잃지 말고 성형하지 말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닮고 싶은 배우는 담백한 느낌에, 사려 깊고 지적인 맷 데이먼. ‘넝쿨째 굴러온 당신’ 때는 포스터에서 얼굴도 잘 알아볼 수 없는 14번째 출연자였지만 인기가 치솟아 비중이 주연급으로 커졌다. 당시 등산복 입고 방송국 오는 배우로 유명했다. 지금도 작품이 없으면 주로 산에 간다. “아직 덜 알려진 얼굴인지 등산복 입으면 몰라 본다”고 한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반지하를 벗어나 80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는데 사기를 당했다”고 털어놨다. 창만이 같은 얘기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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