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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이경재가 없어야 KB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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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낙하산 권력 투쟁으로 얼룩진 KB금융지주 잔혹사(?) 8년을 훑다 보면 한 인물과 반드시 만나게 된다. 5년째 KB금융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이경재다. 그는 세 명의 KB 회장을 자기 손으로 뽑았다. 어윤대와 임영록, 윤종규 내정자다. 앞의 두 사람은 조직 내부의 갈등 끝에 회사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물러났다. 윤 내정자의 앞날을 가늠하긴 아직 이르지만 벌써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고 있다.

 이경재는 4년 전 어윤대를 “실력이 회장감이어서 뽑았다”고 했다. “청와대나 감독 당국에서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다”며 “결코 낙하산이 아니다”란 말도 했다. 그는 ‘한국은행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꼿꼿, 소탈로 유명했다. ‘금융계의 살아 있는 선비정신’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증한다는 데야. 은행 실무경험이 전혀 없는 어윤대가 KB 회장 자리를 꿰차고도 거센 비판을 피해갈 수 있었던 데는 이경재의 공이 컸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이경재는 어윤대와 줄곧 불협화음을 냈다. 2년 전 어윤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ING생명 인수를 무산시키는 데 앞장선 이도 이경재였다. 당시 이경재는 자신과 같은 쪽에 서서 어윤대와 각을 세웠던 임영록 사장을 이듬해 차기 회장으로 뽑았다. 이경재는 임영록을 “3년간 KB금융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그룹 사정에 정통해 현재의 위기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최적의 인물인 것으로 판단했다”고 평했다. 그의 평가가 참 무색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데 1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이번 윤종규 내정자 낙점에도 이경재는 결정권을 행사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는 윤종규와 하영구 후보 간 접전이 이어지자 “외부 인사는 안 된다”며 병실에서 뛰쳐나와 윤종규에게 한 표를 던졌다. 윤종규를 ‘내부’로 분류하는 근거도 애매하긴 하지만 윤 내정자는 사실 최종 후보 4인 중 가장 큰 결격 사유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국민카드 합병 당시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4년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았다. 규정상 중징계를 받은 자는 이후 3년간 금융회사 임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규정만 3년일 뿐, 한 번 중징계면 평생 금융회사 요직은 물 건너 간다는 게 금융계의 불문율이다. 고객 돈을 신의·성실의 원칙하에 관리해야 하는 금융업은 어느 업종보다 도덕성을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금융지주회사법 38조에 임원의 요건을 “회사의 공익성 및 경영의 건전성과 거래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이유다. (물론 당시 감독 당국이 지나치게 경직된 잣대를 들이댔고 윤종규는 희생양이 된 측면이 강하다는 동정·옹호론이 있다.)

  하지만 감독 당국(옛 은행감독원) 출신인 이경재는 이를 문제 삼기는커녕 윤종규 지지에 앞장섰다. 한 금융계 인사는 “KB금융은 뉴욕증시에도 상장돼 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분식회계 전력의 CEO를 둔 회사를 곱게 봐줄 리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KB가 내 회사고 내 전 재산을 털어 넣은 곳이라도 그런 인선을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서 능력이나 적격성보다 친분이 인선의 기준이 아니었느냐는 의구심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이런 의구심을 털어내는 방법은 하나다. 이경재부터 당장 용퇴하는 것이다. 그래야 “친한 사람 회장 시켜놓고 (사외이사들이) 자리 보전하려는 것 아니냐”는 음해성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퇴는 무슨 사퇴”라며 버틸 게 아니다. 물론 그 심정, 이해는 간다. 금융당국과 여론이 마녀사냥식 사퇴 압박에 나서니 반발심부터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죄 없이 큰 죄인 취급받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대국을 봐야 한다. 벌써 노조가 행장실을 점거하고 ‘특별 임금’ 운운하며 새 회장 길들이기에 나서고 있잖은가. KB금융과 윤종규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이경재가 죽어야 KB가 산다. 자신이 세 번째 뽑은 회장마저 실패학의 전범으로 남겨서야 되겠나.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