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메리토크라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프랑스를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 위주 사회)라고 규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능력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 체제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능력의 잣대는 학력이다.

고졸이냐, 일반 대학 졸업자냐, 특수 대학인 그랑제콜 출신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수재들이 몰리는 그랑제콜 출신에겐 출세가 보장된다. 유명 정치인과 정부 고위 관료, 주요 기업체 임원은 대개 그랑제콜에서 엘리트 과정을 밟았다.

프랑스식 메리토크라시는 무료.의무.종교 중립적 교육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는 기회의 평등에서 출발한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빼앗겼다는 말은 프랑스에선 통하지 않는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비가 거의 없다.

교육 기회는 공평하지만 대학의 인재는 엄정한 선발 절차를 거쳐 걸러낸다. 에그자맹(examen)과 콩쿠르(concours)가 그 방법이다.

에그자맹은 일정 점수 이상만 얻으면 되는 자격시험이다. 일반 대학에 입학자격을 주는 바칼로레아가 그 예다. 응시자 중 절반 이상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일반 대학에 간다.

반면 콩쿠르는 경쟁을 벌여 소수 정원만을 선발하는 논술형 주관식 시험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콩쿠르에 응시해야 한다.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처럼 재수.삼수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벌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프랑스 국민은 불평하지 않는다. 성별.인종.나이.지역을 떠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회가 열려있는데도 공부를 안한 건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본고사 부활 논란이 한창이다. 한 사회조직이 필요한 사람을 골라내는 제도가 시험이다. 시험에 공정한 경쟁과 평가 장치가 있다면 그 권위와 효용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도 프랑스 못지않게 학력을 중시한다. 하지만 메리토크라시라고 말하기엔 이르다. 경쟁을 외면하는 무차별적 평등 지상주의에 자꾸 매몰된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으로 인재를 발굴할 수 없고, 경쟁이 없으면 상대의 우월성을 인정하는데도 인색해진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