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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품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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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텔레그램으로의 사이버 망명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나도 그만 얼떨결에 망명을 하고 말았다. 특별히 감출 이야기도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불안해서다. 이런 소심한 행동을 망명이라고 부르자니 단어가 주는 엄청난 무게가 버겁다. ‘혁명 또는 그 밖의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있거나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해 외국으로 몸을 옮기는 것’이라는 거창한 사전적 정의만 보아도, 원래 망명은 깊은 고뇌 후에 이루어지는 고독한 결단이자 최후의 선택일 터이니 말이다.

 예술가 중에는 유난히 망명자가 많다. 예술이란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유롭거나 새로운 시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독재국가일수록 예술가의 망명이 잦을 수밖에. 역설적으로 예술의 효과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독재자다. 잘 만들어진 연극이나 공연 하나가 대중의 눈과 귀를 막는 데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표현 욕구와 충돌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극단적인 정치체제에서 예술가들에게 망명은 때로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기도 하다.

 자유와 신념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용기는 종종 망명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비판의식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1937년 나치가 스페인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해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분노하고 절규한다. 이때 그려진 명작이 바로 ‘게르니카’다. 전쟁의 비극과 참화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흑백 톤으로 처리된 전쟁의 광기와 참상은 공포를 넘어 괴기하다.

 브레히트 역시 나치 때문에 망명한 유명한 극작가이다. 독일에서 덴마크로, 다시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동독과 서독 사이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단한 경로를 거친다. 그는 관객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지양하고, 객관적이고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도록 하는 소격효과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 소격효과야말로 자신을 망명하도록 만든 선전선동의 광기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예술가들의 망명 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창작의 자유를 찾아 망명했지만 새로운 국가에 적응을 못하거나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공을 했어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애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톡은 뉴욕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향 부다페스트로 돌아가는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서 큰 명성을 날린 음악가 라흐마니노프도 늘 향수병에 시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예술가의 망명이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던가.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작곡가 윤이상이 바로 망명자가 아닌가. 독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에서 옥고를 치렀고, 간신히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독일로 귀화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리움이 컸던 걸까. 죽을 때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던 그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절절하다. 망명과 유배로 점철된 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 그의 삶은 고단하고 지난하기 짝이 없었으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오롯이 그의 예술로 승화된다. 오죽하면 차이콥스키 음대 졸업 작품의 제목이 ‘조국’이었을까.

 망명이 이들의 예술을 풍성하게 했다면 아마 그것은 예술이 인생의 지난한 고통을 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망명을 하게 만드는 사회도, 망명을 하는 개인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예술은 고통을 통해 아름답게 꽃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주는 것은 병리적 가학증이다.

 조금만 더 관대할 수는 없을까. 오늘도 인터넷에는 서로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증오가 난무한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자기와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이 나라를 떠나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거칠고 생경하기만 하다. 서로 다른 생각이 사회를 발전시킨다. 다른 것이 창의적이고 경쟁력이다. 종(種)이 다양한 숲이 아름답고 건강한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이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