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공무원 수난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하기는 해야 하는데….’ 고위직 관료로 퇴직한 친구가 말끝을 흐렸다. 내가 더 묻자 말을 이었다. ‘속 심정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거지.’ 이 두 마디가 요즘 논란 중인 공무원연금 개혁의 요체다. ‘개혁의 당위성’과 ‘공무 헌신에 대한 사회적 인정’. 공무원은 마피아의 친척뻘쯤 되는 관피아가 됐다. 대통령이 그렇게 호칭했다. 거기에다 빚을 안겨주는 재정적자의 주범이다. 1000조원 빚 가계에 향후 10년간 50조원을 더 얹는 주역이 공무원연금이라고 했다. 관피아와 나랏빚의 주역, 박봉에 겨우 지탱해 온 지난 청춘이 아리기만 하다.

 1960년대 초 공무, 국방, 교육을 국가 운영의 기본 축으로 설정하면서 군사정부가 도입한 게 직역연금이다. 공무원, 교사, 군인에게 세금으로 노후를 보장하는 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국가가 고용주였으므로. 시대가 한참 바뀌자 세 개 연금 모두 ‘더 내고, 덜 받고, 늦게 받는’ 일대 수술과제에 봉착했다. 세 직업군이 상대적 박봉을 견뎌온 원천은 국가에 헌신한다는 자긍심, 고용안정성, 그리고 후한 연금이었다. 특히 100만 공무원이 그랬다. 복지부동, 부정부패, 집단이기주의라는 비난이 자주 쏟아졌어도,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 관료가 우수하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국가 주도 경제성장이 성공한 배경에는 관료들의 높은 헌신도와 열정이 놓여 있다. 민간 부문이 눈부시게 성장할 때 공무원들의 처우는 관심 밖이었다. 민간 부문이 잠재성장력을 소진하자 이제 공무원들의 안정적 고용환경과 높은 연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 관피아들이 연금마저 높다? 공무원 수난시대의 사회정서다.

 공무원은 국가의 주춧돌이자 정권의 수족이다. 그런 만큼 청와대와 여당은 정권의 신경세포인 관료집단의 심사를 우선 헤아려 주는 것이 순서였다. ‘후손들과 대한민국의 기반을 살리는 길’이라거나, ‘애국심을 발휘해 동참할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호소에 앞서 공무원의 노고, 헌신, 열정을 재평가하고 ‘존재 이유’에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면 저렇게 12만 명이 운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서운하고 섭섭하다.

 어떤 연금이라도 제도 설계의 초기 조건이 소멸되면 수정해야 한다. 납세자원을 반감시킨 저출산과 퇴직자의 기대수명 연장으로 연금 삭감은 불가피해졌다. 고금리 시대에는 일시금으로 받는 게 유행이었다. 저금리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대부분 연금으로 몰리자 재정적자가 가속화됐다. 남미처럼 연금 운영을 민간 은행에 맡기지 않으려면 통 큰 양보가 맞다. 급여액이 과도하다는 비판도 수용해야 한다. 20년 이상 납부하면 국민연금은 평균 84만원, 공무원은 229만원을 받는다. 평등주의에 유독 예민한 한국 사회가 이걸 짚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만 국민연금과는 역사, 출발점, 기본 가정이 다르고 기여분이 달랐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공무원연금의 역사는 54년, 박봉의 7%를 보험료로 냈다. 퇴직금도 푼돈 수준이다. 공무원 가계가 그리 풍족하지 않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보수는 현재 민간 평균임금의 85% 수준이고 그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외환위기 같은 중대 시기에 공무원연금을 공적 자금으로 투여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떼인 돈도 적지 않다. 공공성 증진을 위해 알게 모르게 손해를 감수했다는 얘기다.

  90년대 초중반 스웨덴과 독일이 처음 연금개혁에 나섰다. 당시 총선의 가장 민감한 이슈가 연금 개혁이었다. ‘연금 개혁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글귀가 도처에 나부꼈다. 두 가지 수단이 동원됐다. 정률 기초연금을 삭감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소득비례연금과 개인연금을 신설해 금융시장을 활성화한다는 취지였다. 연금수급자들이 동의했다. 연금 일부를 금융과 연동시킨 것인데 일자리 창출은 당연한 결과였다. 삭감액은 부가복지와 살아난 경제가 보전해 줬다. 국가 헌신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온 공무원에게 양보를 요구하려면 솔선수범할 대의명분을 줘야 한다. 연금을 깎으면 후손들을 위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가? 사익이 판치는 나라에서 공익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가? 공무원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명감 말이다.

 고용안정과 연금은 우수 인력을 끌어당기는 유인제였다. 그 우수한 인적자본이 우리의 성장에 투여됐다. 더러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지기는 했어도 공무원의 자기관리를 촉발하는 긴장요인이 연금이었다. 징계 기록이 있으면 연금에 불이익이 가해지는 내부 규율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국민연금과 같아지면 충성(loyalty)보다 이탈(exit) 유혹이 커지고, 한탕주의 욕망이 슬슬 자라날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유례없는 이 ‘성공의 위기’를 딸이 수습해야 할 길목에 공무원연금이 놓여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