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당연히 이기겠지"…너무 방심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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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沖繩)에서 무적 '한국호'가 침몰한 것은 마치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사건과 비견된다.

타이타닉호는 어떠한 자연조건 하에서도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완벽한 배였고 최강 5인으로 구성된 한국의 '드림팀' 또한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완벽한 팀이었다.

그러나 CSK배 바둑아시아대항전에 출전한 한국팀은 타이타닉호가 그랬던 것처럼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27일의 1회전에서 한국은 약팀으로 편성된 중국에 4대1로 이겼다. 조훈현9단이 위빈(兪斌)9단에게 졌을 뿐 이창호9단.유창혁9단.이세돌6단.송태곤4단이 딩웨이(丁偉)8단.둥옌(董彦)7단.류징(劉菁)8단.왕시(王檄)4단을 차례로 꺾었다.

일본도 대만을 4대1로 이겼는데 사실 대만의 5장 황샹런(黃祥任)3단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출신만 대만일뿐 모두 일본 기사나 다름없었다.

충격적인 사고는 28일의 일본전(2회전) 때 일어났다. 한국은 굳게 믿었던 이창호9단과 이세돌6단이 하네 나오키(羽根直樹)9단과 요다 노리토모(依田紀基)9단에게 불계패했고 유창혁9단과 송태곤4단마저 야마시타 게이고(山下敬吾)9단과 유키 사토시(結誠總)9단에게 불계로 꺾였다. 조훈현9단만이 가토 마사오(加藤正夫)9단을 이겨 한국은 1대4로 대패했다.

마지막 날인 29일, 한국은 대만에도 2대3으로 지는 쇼크를 경험했다. 전날에 이어 이창호.유창혁.이세돌 3강이 장쉬(張)8단.왕밍완(王銘琬)9단. 왕리청(王立誠)9단에게 잇따라 졌다.

"일본은 잔칫집이었다.한국은 당할 수 없다고 보고 2위가 목표였는데 우승까지 하자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고 조훈현9단은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일본에 졌을까.

첫째, 일본기사들의 전법이다. 일본 기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먼저 실리를 차지한 다음 대모양을 삭감하는 전형적인 전법으로 나왔다.

하네 나오키9단과 장쉬8단은 바로 이 전법으로 이창호9단을 무너뜨렸다. 이세돌6단도 왕리청9단과 요다9단에게 똑같은 전법에 걸려들어 공격실패와 함께 허물어졌다. 세력바둑으로 유명한 야마시타9단마저 비슷한 전법으로 유창혁9단을 쓰러뜨렸다.

둘째, 일본 기사들이 거칠고 전투적인 '한국류'에 대한 적응력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짜 패인은 정신력, 즉 '방심'탓이라는 게 조훈현9단의 고백이다. 한국팀은 상대를 가볍게 여겼다. 단체전이니까 내가 지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지난해 1승9패의 치욕을 씻고자 필사적이었다. 3연승으로 일본 우승을 이끈 요다9단은 대회전부터 "일본은 이길 수 있다"고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그렇더라도 세계대회에서 23연속 우승을 거둬왔고 단체전 불패신화를 이어온 한국의 패배는 충격 그 자체다. 특히 세계 정상을 다투는 李-李 '투톱'의 연패는 팬들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패배가 한국 바둑에 좋은 보약이 될 것이란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이 인간의 자만을 경계하고 자연의 힘을 다시 보게 만들었듯이 이번 한국 바둑의 패배 역시 비슷한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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