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9)<제 77화>사각의 혈투 60년(17)일제 하의 권투|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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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국에 권투가 도입된 것은 1916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이 해에 필자가 세상에 태어났다.
서양 스포츠인 복싱을 이 땅에 소개한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 「길레트」(한국명 길례태)다. 복싱뿐만 아니라 농구·축구 등이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전해졌으며 기독교청년회(YMCA)를 통해서였다.
나의 희미한 기억으로는 이 당시 화장품과 같은 「신기한」서양상품을 팔러 다니던 백계노서아 행상인들이 시장바닥에서 글러브를 끼고 복싱흉내를 내는 일이 가끔 있었다.
1927년 충남 갑부로 유명하던 성의경이 서울 원서동에 「조선권투구락부」를 창설했다. 한국 역사상 특정종목의 전용체육관으로서 효시다.
성의경은 비원 뒤쪽에 있던 대저택의 한 귀퉁이에 50여평의 체육관을 지어 권투지망생을 불러들였다.
성의경은 그 자신이 일본 전수대를 다닐 때 복싱과 인연을 맺어 완전히 매료되었다. 동생들인 유경 만경 세경 시경 등도 모두 구락부에 나와 복싱을 배웠다.
이 땅에 복싱을 보급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조선권투구락부는 40년에 혜화동으로 이사했다가 43년 일제에 의해 적성스포츠라 하여 야구와 함께 금지 당할 때까지 존속, 많은 선수를 배출했다.
첫 공식대회는 1928년. 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 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였다.
그리고 이해 11월25일 원산출신의 김정원이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선 첫 프로복싱선수로 데뷔했다. 그의 링네임은 소림신부라는 일본 이름이었다.
그 1년 후 제2회 일본 신궁대회에 처음으로 한인이 참가, 소림신부는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인 최초의 프로복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일본 챔피언이었던 김정원은 불행한 죽음을 당해 한일복싱사에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어 있다.
30년 8월31일 오오사까에서 김정원은 필리핀의 강타자「보비·윌스」(당시 24살)와 대전했다.
갑자원 링에서 대결했다. 이보다 약2개월 앞서 김정원은 「조·새크러맨트」라는 필리핀선수와 대전한 적이 있었다. 일본 챔피언 소림신부(김정원)는 「조·새크러맨트」의 적수가 못되었다. 처음부터 난타 당하더니 2라운드 들어 부강이 심해 기권, TKO패했다.
이 2개월 전의 악몽을 채 씻기도 전에 다시 필리핀선수와 맞선 김정원은 설욕의 투지에 불탔으나 역시 수준차가 현격했다.
「보비·윌스」는 가공할 펀치를 거의 매 라운드 김정원의 안면에 질러댔다. 김정원은 몇번이나 다운됐다. 그러고도 끈질기게 또 덤볐다.
마침내 9라운드 2분40초 김정원은 피투성이의 처참한 몰골로 영원히 침몰될 듯이 주저앉았다. 주심의 카운트가 계속됐다. 김정원은 사력을 다해 또 일어서려고 버둥거렸다. 그제서야 세컨드가 타월을 던져 더이상의 무모한 자살행위를 저지했다.
그러나 이 만류는 운명을 약 12시간 지체시켰을 따름이다.
뇌의 동맥이 끊어진 김정원은 이튿날 아침 고오베의 동명병원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사고 후「보비·윌스」는 기고만장하여「살인 보비」라는 별명을 만들어 선전, 한반도·만주까지 원정 다니면서 돈을 벌었다.
김정원에겐 정섭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소림치부란 링네임으로 역시 프로선수가 되었다. 오로지 죽은 형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베를린올림픽의 해인 36년 7월 27일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31살의 늙은 원수「보비·윌스」와 맞섰다. 신문들이『링의 복수전』이라 하여 대서특필했고 관객이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역부족, 김정섭의 판정패였다. 상심의 김정섭은 그 얼마 후 폐병으로 죽고 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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