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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스리 장군(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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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지즈·엘·마스리」장군이 며칠 안에 만카바드를 방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우리는 부대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여 부대전체를 정리 정돈했다.

<낫세르는 5대대>
드디어 마스리 장군이 도착했다. 우리들이 모두 도열한 가운데 장군은 제4대대와 제5대대를 검열했다. 나는 4대대 소속이었고 고인이 된 낫세르는 5대대 소속이었다. 검열이 끝날 무렵 그는 부대식당으로 가서 장교 전원을 불러 『여러분들은 아, 근처에 있는 불타버린 수도원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누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읍니까?』라고 물었다. 수도원 얘기는 우리들에겐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아무도 그 유명한 사적지를 가보지 않았다니 어찌된 일이요? 어쨌든 나와 함께 그곳에 가봅시다. 당장 차량을 준비하시오.』
수도원 자리는 부대에서 자동차로 l시간 거리였다. 수도원 자리에 도착하자 그는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가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바로 이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들은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내가 알고있던 지휘관들과는 다른 특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한 명성을 지닌 지휘관이었고 더우기 역사적인 유적지로 우리를 안내하여 수시간이나 할애해 우리들에게 실명도 해주었다. 나는 마스리 장군이 경찰대학장으로 있었을 때 학생과 교수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훈련시간에 반드시 직접 참여했다. 송수관을 기어오르는 훈련에서 그는 직접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결단성과 자신감은 「파루크」왕자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알수 있었다. 「푸아드」왕은 마스리 장군에게 「파루크」왕자가 영국에 유학하는 동안 왕자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파루크 왕자의 유학>
왕가를 이을 왕자가 영국에 보다 큰 충성심과 사랑을 갖고 순종하도록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영국은 푸아드 왕에게 파루크 왕자를 영국 구축함편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국으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푸아드 왕은 파루크 왕자를 믿음직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푸아드 왕은 「아지즈·엘·마스리」를 파루크 왕자의 보호자로서 동반하도록 했다. 또「아메드·하사네인·파샤」란 사람도 동행토록 했다. 「아지즈·엘·마스리」는 런던으로 떠났다. 그후 얼마안가 우리들은 그가 혼자 카이로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우리들은 그가 굳은 결의와 열성으로 보호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는 왕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 생활계획표를 만들었다.
이같은 일은 파루크 왕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활계획표대로라면 파루크 왕자는 마음대로 놀거나 밤늦도록 즐기지도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또다른 보호자인 「아메드·하사네인」은 파루크 왕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무한정 자유를 주었다. 결국 파루크 왕자는 푸아드 왕에게 「아지즈·엘·마스리」를 불평하는 편지를 보냈다. 푸아드 국왕은 「엘·마스리」를 카이로로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루크 왕자는 매우 기뻐했고 영국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마스리」가 영국인들을 증오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영국은 파루크 왕자가 공부하는 동안 「엘·마스리」가 「파루크」왕자 곁에서 시중을 들 경우 왕자도 「엘·마스리」의 사고방식에 물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엘·마스리」의 소환결정은 이같은 우려를 씻어주었다.
「마스리」장군은 강한 개성과 인품, 자신감과 애국심, 그리고 점령국 영국에 대한 분노 등으로 우리에게 잊혀질 수 없는 감명을 남긴 후 우리 부대 방문을 마치고 카이로로 돌아갔다.
2차대전이 터지자 나는 카이로의 통신대로 전속되었다. 이 통신대는 이집트군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부대였다.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장교들과 기술자들이 이 부대를 맡고있었다.
나는 카이로에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만카바드를 방문했던 「엘·마스리」장군으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계속 꿈꾸어왔으나 만카바드에서의 근무조건으로는 허락되지 않던 일을 처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동료 장교들간의 토론회를 주선했다.
토론회에서는 이집트를 점령한 영국 당국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해 정치·사회적 문제전반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를 넓혀갔다. 토론회를 통해 동료들의 견해를 듣고 그들 중 누가 나의 정치활동에 동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집트의 부패상을 개탄하고 있었지만, 일부 장교는 정치문제에는 개입해서는 안되고 다만 군사문제만 거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병들도 좋아해>
고 「아메드·이스마일」같은 사람이 그같은 주장을 폈다.
나의 1년 후배였던 그는 나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내 방에서 자주 어울렸으나 결코 정치문제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통신대에서 동료들 사이에 정치활동을 넓혀갔다. 나는 소위 「여론」이라는 것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내가 당직사관차례가 되면 사병들에게 여러 가지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정치토론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교양강좌의 형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딱 꼬집어내 나를 문책할 수 없도록 간접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집어넣곤 했다.
사병들은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그들로서는 젊은 장교가 이같은 배려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고함과 친구들을 떠나 병영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불만에 차있는 장교들만 봐왔던 터였다.
그때까지 장교들은 사병들을 교육시키고 토론하며 사병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바로 이런 일을 했고 결과적으로 나와 사병들 사이에는 상호 사랑과 이해의 강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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