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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만물박사 다산 정약용도 ‘중앙은행’은 몰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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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호 20면

청일전쟁(1894년) 당시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이 전한 한성의 어수선한 풍경. [사진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의 추는 이성계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그렇지만 정몽주를 포함한 많은 충신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고려를 살려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중에는 40대 하위 관리인 방사량(方士良)도 있었다. 그는 정치·경제·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것들을 정리(시무 11조)하여 공양왕에게 바쳤다. 그것은 이성계 측으로부터 미움을 감수해야 하는, ‘튀는 짓’이었다.

③ ‘화권재상’ 사상

방사량이 제안한 것 중에는 포화(布貨)와 같은 물품화폐 대신 종이돈을 쓰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저화(楮貨) 즉, 닥나무로 만든 종이돈은 발행된 지 1년도 되기 전에 고려의 멸망을 목격했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한 뒤 저화를 소각하고 발행기관을 폐지했다. 그렇게 화폐제도는 과거로 돌아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종이돈의 발행은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았다. 왕자의 난 이후 등극한 태종은 지난날의 생각을 바꿔 종이돈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화권재상(貨權在上)’ 즉, 화폐를 발행하는 권한은 왕이 갖는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종이돈은 워낙 파격적인 생각이라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화 사용을 강력히 권장했던 태종이 죽은 뒤, 이 돈의 수요는 계속 감소하여 흐지부지 사라졌다.

전환국에서 제작한 20환짜리 주화 시제품(시주화). 주석 위에 금도금 한 뒤 서양의 돈을 흉내 내어 화려한 무늬와 함께 제작시기(1886년)를 명기했다. 그러나 여기에 적힌 ‘환(圜)’이라는 화폐단위는 근거가 없다. 당시 공식 화폐단위는 여전히 ‘냥(兩)-전(錢)-푼(分)’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화폐 제조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한자 ‘圜’을 한글 ‘원’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영문표기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경성전환국을 관리하던 독일은 WARN으로, 인천전환국을 관리하던 일본은 WHAN으로, 용산전환국을 관리하던 러시아는 WON으로 표기했다.

서양식 동전에만 집착했던 고종
조선의 화폐제도가 퇴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무본억말(務本抑末) 즉,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업에 힘쓰면서 상업은 천시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상거래에 쓰이는 돈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있을 수 없었다. 어떤 왕들은 돈을 만드는 것 자체를 기피했다. 돈을 만들다 보면, 자금력을 가진 지방 토호세력과 병력(노동력)을 가진 군부가 접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역모가 생길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돈이 귀해지는 전황(錢荒) 현상까지 나타났다.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리학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 문제에 관해서는 성리학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화폐가 사치와 소비를 조장하는 원인이라고 보고 화폐 없는 물물교환경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성호사설』). 다산(茶山)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서문에서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는 절박한 심정을 밝히고 혁명적 수준의 개혁이 필요한 것들을 44권에 걸쳐 낱낱이 지적했다. 거기에는 화폐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다산이 주장한 것은 화폐발행 전담기관인 전환서(典圜署)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이익보다 진보적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다산이 생각한 금융선진화는 주화 제작을 담당하는 주전소(鑄錢所)와 포화를 관리하는 사섬시(司贍寺) 등을 통폐합하는 정부조직 개편이 전부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한국은행은 모르고 한국조폐공사만 알았던 것이다.

다산의 주장은 그가 죽은 지 40여 년 뒤인 1883년 전환국(典圜局)이 세워지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고종이 화폐 문제에 강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독일인 뮐렌도르프(한국명 목인덕)로부터 서양식 돈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미국과 청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화 제작에 필요한 압인기를 수입하고 전환국을 통해 이런저런 돈을 만들도록 했다. 덕분에 수백 년 동안 전혀 변함이 없었던 돈의 디자인이 갑자기 다양해졌다.

고려 때 발행된 건원중보(乾元重寶) 이래로 모든 돈은 네모난 구멍이 있었다. 중국 돈을 모방한 것인데, 이것은 하늘은 둥글고 인간 세상은 사각형이라는 중국의 우주관 즉,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시각화한 것이다. 고종은 그런 디자인에서 벗어나는 것이 조선의 자주성 회복이라고 믿었다.

고종은 돈 문제에 집착하면서도 화폐제도라는 큰 틀을 몰랐다. 그래서 일본이 시키는 대로 일본처럼 은본위제도를 채택했다(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 그러나 재정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은화 대신 니켈과 구리를 섞은 백동화(白銅貨)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돈은 청일전쟁 중 일본군 지원을 위해 남발되었다. 대원군의 ‘당백전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뒤 은본위제도를 도입했건만, 이번에는 ‘백동화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민생은 또다시 도탄에 빠졌다.

그러자 러시아가 나섰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러시아는 한아(韓俄)은행에 출자(1898년)하여 고종의 환심을 산 뒤 전환국을 인천에서 용산으로 옮기고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도록 설득했다. 친일파와 일본을 발권시설에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당시 재정고문 알렉세예프는 러시아(1897년)와 미국(1900년) 등을 예로 들면서 금본위제도가 대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산업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고종의 금본위제도 선언(1901년 화폐조례)은 일종의 만용이었다.

고종은 사상 최초로 금화를 발행하는 데 기대감이 컸다(그러나 금이 부족하여 도금화를 발행했다). 금본위제도에 맞추어 ‘환(圜)’이라는 화폐단위도 선포했다. 이는 진시황이 선포한 ‘전(錢)’의 세계에서 졸업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실상은 러시아의 제안, 독일의 기계, 일본인 기술자가 뒤섞인 외세의 결정체였다. 이때 만들어진 몇 개의 시제품은 햇빛도 보지 못한 채 금고 속에서 제국의 종말을 맞았다. 방사량이 제안했던 저화와 마찬가지로 너무 늦게 발동이 걸린 화폐 개혁의 예고된 숙명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공개리에 청군을 참수하는 일본군의 잔혹한 모습. 전쟁 직후에는 백동화 인플레이션 때문에 온 나라가 신음했다. 돌이켜 보면 고종이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조폐시설을 인천으로 옮긴 것은 일본 마음대로 돈을 찍으라는 허가를 내 준 것과 다름없었다. [사진 MIT대 도서관]

서랍 안에서 실종된 대한중앙은행
고종은 화폐제도만 몰랐던 것이 아니다. 은행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1882년 재야 유학자 고영문이 국립은행의 설치를 건의하자 고종은 “절실하고 긴요한 문제이나,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고종실록』). 이후 은행업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조선은행(나중에 한흥은행으로 개명), 대한은행,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민간은행이 자생적으로 설립되고 러시아의 주도로 한아은행이 문을 연 뒤였다.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에 팽창해 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아은행을 설립하고 금본위제도 도입을 부추긴 뒤 마지막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권고했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은 1902년 ‘중앙은행조례’를 발표했다. 주식회사 형태의 ‘대한중앙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골자였다. 전환국을 세운 지 19년 만에 비로소 발권과 은행을 묶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은 이를 극력 방해했으며, 그것은 러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가 없었더라도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도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탁상공론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1903년 심상훈(沈相薰)과 이용익(李容翊)이 대한중앙은행의 총재와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심상훈은 탁지부대신을 맡아 백동화 발행에 깊숙이 간여한 경험은 있지만, ‘백동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탄핵을 받고 충청북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명성황후의 신임이 깊었을 뿐 중앙은행 제도에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이용익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친러파 인물이다. 그는 보부상 출신의 재력가로서 심상훈에 이어 탁지부대신과 전환국장을 맡은 경력이 있지만, 화폐·금융·중앙은행 제도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주된 임무는 황실을 대신하여 각종 전매사업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대한중앙은행은 영업은커녕 주주도 모집하지 못한 채 서류상의 중앙은행으로서 흐지부지 임종을 맞았다.

한은법으로 부활한 태종의 철학
고종은 물질로서의 돈에 집착했다. 그래서 화폐와 중앙은행을 별개로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전근대성은 현행 한국은행법에서도 보인다. 한국은행법 제47조는 “화폐의 발행권은 한국은행만이 가진다”고 선언한다. 화폐라는 것이 마치 중앙은행보다 먼저 또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한 것이다(외국 중앙은행법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중앙은행이 있어야 화폐가 발행되며, 중앙은행과 무관한 화폐는 없다(따라서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라 화폐를 흉내 낸 것이다).

방사량과 태종의 화폐관은 고종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다. ‘화권재상’의 사상에 따르면 화폐의 존립 근거는 물질이 아닌 국가주권이다. 그래서 불태환 화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화권재상’ 사상은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한국은행법 제48조는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선언한다. 법화는 ‘fiat money’를 번역한 것인데, 라틴어 fiat는 “그것은 그래야 한다(it shall be)”는 명령이다.

불태환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은 국가주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정부와 필연적으로 엮여 있다. 그러나 이 관계에 집착하게 되면, 통치자와 중앙은행이 너무 가까워진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은행이 그랬다. 일본은 “척하면 척” 하는 정부와 일본은행의 관계를 조선에 이식했다. 그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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