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25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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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턱수염을 기르고 시골사람 차림으로 변장한 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 아무도 내 정체를 의심치않았다. 함께 일하는 트럭운전사는 내가 평생 이일만 해온 사람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정확히 말해 45년초에 우리는 큼직한 일거리를 맡게됐다. 가이로남쪽 기자에서 다시 내륙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마스구나라는 마을에 둘을나르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는 카이로에서 남쪽 에스원까지의 도로포장공사를 벌이고있었다. 말이 공사지, 한해에 불과 2Okm정도밖에 닦지못하는 굼벵이사업이었다. 45년도에는 마스구나마을을 중심으로한 20km가 포장될 차례였다. 이 공사를 맡은 건설업자는 이집트에 귀화한「할라트」라는 외국인이었는데, 우리는 그에게서 도로양쪽 가장자리에 까는 연석의 운반작업을 하청받은 것이었다.
날라야할 연석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작업은 꽤 오래 걸렸다. 나로선 카이로에서 멀리 떨어진 어곳에서의 일은 길면 길수록 반가운 노릇이었다. 작업은 겨울이 한참이던 45년1월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석은 트라라는 곳에서 배에 실려 나일강을 타고 운반돼 강상류의 엘 마라지크란 곳에 부려진다. 강가에 내려진 이 둘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마스구나의 도로공사장까지 나르는게 우리 임무였다.
나일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머무르는 곳을 우리는 보통 선창이라고 부른다. 물론 바닷가 항구들의 제대로된 부두와는 전혀 다르다. 그저 나일강가에 배들이 들러 닻을 내리고 짐이나 사람을 싣거나 부릴수 있는지형만 갖추면 선창이 되는것이다.
우리는 둘을 트럭에 싣고 내릴 인부들을 고용하고, 마스구나마을의 빈차고를 빌어 숙소로 삼았다. 나는차고속에 야전침대를 놓고 잤으며, 인부들은 그앞 빈터에 천막을 쳤다.
새생활의 일과는 단조로왔다. 해뜰 녘 모두 일어나 영국식으로 우유를 탄 홍차를 한컵씩 마시고는 곧 선창으로 향한다. 선창과 공사장사이를 트럭으로 왕복하다 12시쯤되면 아침겸 점심으로 빵몇덩어리와 자그마한 치즈 한조각을 먹는다.
식사라고 할수도 없을만큼 소찬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어린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 즐겁기까지 했다. 내고향 마을 미트 아불콤에서 농부들이 먹던 음식도 이와 다를바 없었다. 들일을 하다 끼니때가 되면 여인네들이 음식보따리를 들고 나온다. 음식의 종류는 살림형편에 따라 달랐다.
좀 나을때는 삶은국수 한그릇과 오이절임정도는 먹을수 있지만 쪼들릴때면 쉬어버린 치즈, 혹은 집에서 만든 시큼한 치즈 한조각으로 배를 달래야했다. 하지만 그 시큼한 치즈가 어린 나에겐 얼마나 달콤했는지 나는-코란경을 배우러 마을소학교에 다닐 때도 이치즈조각과 빵을 들고가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감에 잠기곤 했었다.
해질녁 돌운반을 끝내면 나와 인부들은 땀을 씻은후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식당에 몰려가 따끈한 불콩수프에 빵을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이것이 우리의 정찬이었다.
식사후엔 코피숍에서 홍차나 계피차로 입가심을 하곤 라디오를 듣거나 백가몬·도미노노름등을 즐기며 피로를 풀었다.
작업 사홀째되던 날이었다. 이날아침 나는 트럭정비와 연료문제 때문에 마을의 셸석유회사 대리인과 만나야할 일이 있어 인부들만 먼저 트럭에 태워 선창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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