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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양자택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여기에는 당시 소련군 평양시위수사령부(코멘단트·「무르진」소령), 부책임자(코멘단트의 보좌관), 소련군대위 김일성도 끼여 있었다.
김일성은 이사업에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우선 그는 조만식선생과 같은 평남출신이고 젊은 투사였다. 이점이 조만식선생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한 점의 하나는 김일성이 조만식선생과 마찬가지로 교회장로인 강돈욱의 외손자라는 사실이었다. 소련군당국은 조만식선생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김일성을 조선민주당에 파견하려했다.(물론 공산당의 앞잡이로서). 김일성에 앞서 파견된 김책은 조선민주당에서 아무것도 하지않은채 돌아와 버렸다.
민주당의 강령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사사건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김책은 민주당을「근로인민을 위한당」, 「노동계급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하는 당」으로 개조하려했다.
이에따라 김일성을 민주당에 파견하려던 계획도 바로 중지되었다.
어느날 소련군사령부는 소련에서 온 한국인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회의에서 소련군고급장교는 『…현재 북한에서는 민주당이 제일 큰 당이다. 이당에 많은 영향력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김일성은 우리쪽 사람이다. 그는 곧 민주당에 들어가 일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도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보좌해달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소련공산당원을 민주당으로 이적시키든가, 아니면 김일성을 공산당원으로 흡수하든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이틀후 소련군사령부는 김일성이 공산당에 남고 그대신 민주당에는 조만식선생의 제자였던 최용건을 파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소련군당국이 조만식선생을 북한의 지도자후보로 주목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조만식선생의 반대는 소련군당국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일설에는 해방전후 서울에 주재했던 소련외무성 사람들은 조선공산당책임비서인 박헌영을 지도자로 추천했다고도 한다.
북한의 지도자를 고르는데 있어 소련군제1극동방면군군사위원인「스티코프」의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46년2월 북한에 온 그는 아무 미련도 없이 조만식선생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김일성을 새로운 지도자로 내세우자고 「스탈린」에게 건의했다. 이렇게 하여 원래 3인이었던 후보자는 소련외무성이 추천하는 박헌영과 소련군부가 추천하는 김일성의 두사람으로 압축됐다.
「스탈린」은 여러가지로 따져본 후에 김일성을 택했다. 그리고 그순간부터 김일성은 북한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수령」은 이렇게해서 탄생했다.
수령후보의 급제생과 낙제생의 일견 미묘하면서도 극히 단순한 관계는 전자에 의한 후자의 숙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북한의 지도자임명문제에 중공도 전혀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만약 중국공산당에 의견을 물어온다면 우리들은 무정을 추천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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