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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 팔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런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천재적이었다고 북한 어용학자·문필가들이 찬양하는 것이 이른바 「보천보 전투」다.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을 일약 동북합일전선의 명장·스타(일성)로만들었고, 그이름을 전만주와 한반도에 떨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가 김일성의「정치자본」이 돼 그 줏가를 폭등시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할수있다.
『김일성동지의 천재적 전략전술방침에 따라 적의 토벌공세를 물리치는 한편 그의 직접지휘에 따라 1937년 6월4일 보천보전투에서 승리,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그들의 압제에 신음하는 조선인민에 대해 조국해방의 서광을 비춰주었다』 (역사사전제2권·평양·1971년·602폐이지) .
그러나 사실에 있어 보천보전투는 그저 자랑하기에는 너무 전과가 보잘 것 없었다. 일제의 경관과 산림대원 몇명을 사살한데 불과했다. 그러고도 조국해방에 서광 운운한 것은 아무래도 자화자찬이 지나치다고 할수밖에 없다.
김일성의 경력에서 자랑하는 것중의 하나는 그가 조직했다는 이른바「조국광복회」다.
그 조국광복회는 김의 우상화에 있어 보천보전투와 쌍벽을 이루는 정치자본인데 김일성신화의 창조자들은 이문제를 확대· 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기만 날조를 서슴지 않고있다.
예를 들어보자.
1936년2∼5월사이에 김일성은『남호두로부터 동강에 이르는 멀고 어려운 행군에서 험한 산을 넘고 높은 고개를 넘어 천리설원을 달리면서 조국광복회의 위대한 구상을 했다. 이해 5월 역사적인 동강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을 창건할것과, 그 명칭은 조국광복회라고 할것을 제의했다. (역사사전 제2권299∼300페이지)
이 조국광복회에 관한 모든 문장은 최대의 찬사와 기분 나쁠 정도의 표현을 나열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40년대초 김일성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빨치산 부하대원들과 함께 소련에 들어가 망명생활을 하던때다.
따라서 광복회본부를 백두산꼭대기에 설치했다든가 하는 역사사전의 표현등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 김일성이 정말로 조국광복의라는 것을 조직했다고 하자. 그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국제공산주의운동, 특히 국제반파쇼운동의 발전에 거대한 이론적 실천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자신이 남의 것을 자기것인양 도둑질하는 도벽에서 나온것이고 이 도벽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만든 또하나의 정치적 자질이라고 할수 있다.
처음에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였고 조직규율을 이해하고 상부의 지시도 집행할줄 아는 청년빨치산대장이었다.
정체불명의 도당수괴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당원이었고 (1931년 입당), 항일연군 제2군(1934년11월7일창건)의 중요한 지휘요원이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에 이르러 그가 양정우·왕덕태등의 지도하에 활약했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제2군의 영예와성과를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의 공로라고 주장하고 자기것으로 훔쳐 역사를 날조한데 있다.
그리고 김일성이 중공동만특위의 서기였으며 제2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코민테른 제7차대회의 참가자였으며 위증민의 직접적 지도아래 조직된 반일통일전선조직체인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모두 자신의 구상과 지도에 의해 조직된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그것을 당창건의 기초와 거점으로 했다는데 있다.
그러나 조국광복회는 오성륜등에 의해 조직돤 것이며 이같은 사실은 「월간중앙」 73년7월호에도 나와있다.
끝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김일성에게 부과된 사실상의 역할,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에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방해가 되는 것은 김일성 자신으로, 특히 그가 내세우는 주체이론이다.
이것은 30년대, 40년대의 김일성의 발언으로서 오늘날 과장되고 날조되고 있는것은 다 아는 얘기다.
실제 당시에 김일성은 이런 얘기를 할 정도의「현명한」이론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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