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괴테의 아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l832년3월22일 아침, 「괴테」는 불편한 몸을 안락기자에서 일으켜 물을 청했으나 먹지못했다.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환상마저 보았다. 『「쉴러」의 편지를 왜 이렇게 버려 두느냐.』
그리고 하인을 불러 『침실의 창문을 열어라. 좀 더 빛을…』하고 말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괴테」는 83살의 생애를 끝마쳤다. 세계는 위대한 시인이자 「전인격의 사나이」를 잃었다.
「요한·볼프강·폰·괴테」의 1백50주기 기념행사는 동·서독이 정치이념의 차이를 잠시 잊고 「전독일적」으로 거행한다.
「카를·카르스텐스」서독대통령은 「괴테의 아침」리셉션에 1천여명의 손님을 초대하고 세계 각처의 괴테 인스티튜트에선 일제히 기념행사롤 갖는다. 탄생지 프랑크푸르트의 성바오로성당에선 특별미사도 올려진다.
동독도 「괴테의 평화를 위한 정열」이란 이름아래 동구권 국가를 돌며 전시회를 연다. 일본에선 「괴테」작품집 15권이 출간됐다.
「괴테」는 흔히 「레오나르도·다·빈치」와 같은 천재로 꼽힌다. 8살때부터 시를 썼고 13살때에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관한 시편」을 완성했다.
15살때 「그레첸」파의 사람을 시각으로 그의 화려한 여인편력이 시작됐다. 라이프치히 여관집딸 「그레첸」에겐 사랑의 고배를 마신 후 건강까지 해쳤다. 23살 때 「샤를로테·부프」양과의 또 한번의 실연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았다.
이밖에 목사의 딸 「부리온」, 연상의 부인 「폰·슈타인」, 말년의 소녀「울리케」등 숱한 영문이 뒤따랐다. 그에게 여성은 창조의 원천이며 「남성을 이끌어 올리는 힘」의 화신이었다.
청년시절의 「질풍노도 (슈루름·운트·드랑)」를 거쳐 그의 작품은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든 바이마르공국 시절에 완성됐다. 대신과 재상을 지내면서 거작 「시와 진실」 「파우스트」 「친화력」「빌헬름·마이스터」등을 차례로 썼다. 「괴테」는 항상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모험이다』라고 말했다. 노익장은 진정 「괴테」를 두고 일컫는 것 같다.
그가 전인격의 사나이라는 것은 박학하다는 이유때문은 아니다. 정열과 분발과 성실, 그리고 겸손을 추구한 그의 일생 때문이다. 『사람의 가장 고상한 장점은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지 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다』는 금언이 바로 그의 정열을 말해준다.
전유렵에 떨친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성은 자신속에 그 요소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헛된 노력일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분주한 바이마르시대에도 그는 여유를 찾았다. 『고독은 멋진 것, 마음이 평화롭고 완수해야될 과업이 없다면….』
만인의 가슴에 자리잡은 그의 작품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는가, 1백50주기를 맞아 다시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