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원리주의 회귀 … 세계가 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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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25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지지자들이 그의 집 앞에서 당선자의 사진이 든 포스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테헤란(이란) AP=연합]

이란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강경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49) 테헤란 시장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앞으로 원리주의적 이란 신권정치의 입지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내 군사.경제 대국인 이란의 향후 대내외 정책에 변화가 따를 것은 물론이다.

아마디네자드는 26일 선거 후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에너지와 의료 및 농업 분야에서 원자력 기술이 필요하므로 이를 계속 추구할 것"이라며 "이란의 평화적 핵 기술은 이란 젊은 세대가 이룩한 과학적 성과"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이 계속 이란에 대해 적대정책을 견지하는 한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 강경파 압승=이란 국영 TV는 25일 55%의 투표율을 보인 이번 선거에서 아마디네자드 후보가 61.6%를 득표해 35.9%를 얻은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70) 전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실용보수파 라프산자니 후보 측은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군대 등 이란의 국가 조직이 조직적.편파적으로 상대편을 지지했다"며 강력한 불만을 나타냈다.

아마디네자드는 당선 확정 후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는 한 국민, 한 가족이며 위대한 사회 건설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며 화합을 호소했다. 그는 "내 임무는 현대적이고 발전된, 강력한 이슬람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제2의 혁명=아마디네자드 후보가 내건 "혁명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에 국민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이유는 간단하다.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라프산자니 온건보수파 대통령과 개혁파 모하메드 하타미 대통령이 각각 8년 동안 이끌어온 미온적인 개혁 조치에 대해 국민은 등을 돌렸다. 알자지라 방송은 25일 개표 결과 발표 직후 "이란인들이 '제2의 혁명'에 표를 던졌다"고 보도했다.

이번 대선 결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카이로 아메리칸대 왈리드 카지하 정치학과 교수는 "24년 만에 성직자가 아닌 대통령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메네이.라프산자니.하타미는 모두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카지하 교수는 "종교 엘리트가 아닌 서민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내세울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 보수파 정국 장악=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와 같이 보수파 이슬람 세력이 정국을 완전 장악하게 됐다. 이란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와 선거를 거치지 않은 12명의 성직자로 구성된 보수파 혁명수호위원회가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도 보수파의 손에 들어갔다. 이미 2004년 2월 총선에서도 보수파가 12년 만에 의회를 장악했다. 사법부마저도 보수 종교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이란의 개혁파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앞으로 대규모 정치 개혁이나 여성의 권리 신장 등의 조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개혁은 경제.사회 분야에 집중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실제로 아마디네자드는 이번 대선에서 부패 척결, 저소득층 가계자금 확대, 농촌 개발기금.건강보험 확대, 여성복지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서민을 위한 분배에 중점을 둔 정책이다.

◆ 대외 긴장 고조=언론과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외 정책이 강경 노선으로 회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라프산자니.하타미 대통령이 제시한 제한적인 화해 제스처마저도 사라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핵 개발 전면 중단을 요구하는 미국.이스라엘 등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주변 중동국들과의 관계도 편치 않을 전망이다. 이미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국들은 국가 안보 차원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란이 중동 최대의 군사대국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유일하게 이슬람 대중 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모델이 자국 내 이슬람 반정부세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는 수니파 저항단체들과 더불어 반정부 시아파 과격세력들이 반미 투쟁에 다시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중동 내 최대 수출시장인 이란의 경제 정책에 변화가 예상됨에 따라 한국 기업들도 급히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다. 아마드네자드가 정치보다 경제 개혁과 부패 척결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서방국 "앞날 우려 … 선거에 결함"
러시아 "당선 축하 … 핵협력 지속"

▶ 이란의 대통령 당선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26일 테헤란에서 선거 후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테헤란 로이터=연합]

강경보수파의 승리에 대해 미국과 프랑스.영국 등 서방 측은 우려를 표시한 반면 러시아는 축하를 보내 대조를 보였다.

▶미국=마리아 탐베리 백악관 대변인은 "우리는 이란 국민을 위해 더 큰 자유를 촉구하는 사람들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조앤 무어 국무부 대변인도 "이번 선거는 시작부터 결함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이 여성 93명 등 후보 1000여 명의 출마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근거에서다. 그는 "우리는 이 정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할 것"이라면서도 "이번 선거가 실시된 방식으로 볼 때 이란 정권이 자국 국민의 합법적인 희망이나 국제사회의 우려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영국=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은 "이번 이란 대통령 선거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조속한 조처를 취해 줄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러시아는 국제협약의 틀 안에서 이란과의 핵 협력을 계속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런던.모스크바=외신종합

당선자 아마디네자드
서구식 개혁 반대하며 입지 굳혀
생활 청렴 … 빈곤층서 강력 지지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위해서 한 게 아니다." 24일 이란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49)가 즐겨 쓰던 말이다. 이슬람 강경보수파의 서방에 대한 인식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란식 민주주의, 이란에 적합한 경제 체제를 주창하는 그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56년 테헤란 인근 가름사르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인생역정을 거쳤다.

"배가 고파서 (79년) 혁명에 참여했다"는 그의 말은 30%에 육박하는 실업률에 허덕이는 이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고 한 시장통 이란인은 알아라비야 방송에서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선 배경의 하나로 이란 내 반미감정을 들고 있다. 마흐디 미르말렉이라는 청년은 "미국의 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를 선택했다"고 AP통신 기자에게 말했다.

실제로 아마디네자드의 청년시절은 반미 운동으로 점철돼 있다. 이슬람 혁명 직후 당시 이란 과학기술대학 학생이던 그는 테헤란 미국대사관 점거로 유명한 강경단체'통합강화본부'에 가입했다. 대사관 점거를 위한 사전 기획 회의에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80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그는 자원입대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전쟁 당시 이란의 혁명정권을 보호하는 최정예 혁명수비대 특수부대 사령관에까지 승진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종교 보수주의 분위기가 강한 북서부 아르데빌주(州)의 지사로 임명됐다. 2003년 고향인 테헤란에 시장으로 금의환향해 부패 척결과 청렴한 생활로 빈곤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왔다.

이후 그는 하타미 대통령의 서구식 개혁정책에 가장 강력히 반발하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개혁주의자들이 세운 시설을 폐쇄하고, 시청 남성 직원들에게도 긴 셔츠를 입을 것을 독려했다. 서구식 패스트푸드 음식점을 폐쇄하고, 영국의 유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등장하는 광고를 철거하기도 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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