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혈전|쌀파동계기로 본 「국제상인」들의 생리와 실태<2>|자원정보전 기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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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쌀파동이 한바탕 몰아치고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쌀 뿐이랴. 이제껏 원유와 식량이 가장 각광(?)받는 국제상전의 총아로 군림해 왔지만 이밖에도 원당·원면·원피·생고무·원모·펄프·원목·비철 등 국제상전의 도구가 돼온 원자재는 무수히 많다. 1백가지의 자원이 1백개의 국가에 고루 나누어져 있지 않는 한 자원전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원자재의 흐름을 둘러싸고 얽히는 각국 업자들간의 이해는 곧잘 국제간의「어른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우리의 경우만 해도 이번 쌀파동 훨씬 이전인 지난 75년 초 역시 한미간 원면분쟁의 기억이 있다.
74년 상반기부터 시작된 국제적 자원파동 때 국내 면방업자들은 너도나도 서둘러 미국원면의 장기공급계약을 맺으려고 혈안이 됐다.
정부도 원자재비축자금을 풀어 빨리 사도록 독려했고 국내 어느 메이커는 2년치를 확보하여 선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비싼 값으로….
그러나 불과 반년도 채 못돼 원면의 현물시세는 74년초 수준의 30%까지 폭락했다. 정보에 어두워 소위 상투를 잡은 것이다. 원면을 많이 확보했다고 부러움을 샀던 회사는 급전직하, 큰 손해를 보고 그것이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계약당시의 조건대로 미면을 수입, 가공하여 수출했을 때 제품가격의 하락까지 셈해서 업계가 입는 손실은 어림잡아 7백59억원 규모였다.
국내 업체들은 당연히 신용장 개선을 기피했고 이번엔 미국측 수출업자들이 들고일어나 한국산 면제품수입규제라는 외교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양국정부가 끼어들고 미상품신용공사(CCC)의 3년 연불신용자금을 빌어와 계약대로 이행할 수 밖에 없었다.
국가간의 신의는 지켰지만 업자간의 상전에서는 완전히 패배, 원자재의 장기수급예측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준 귀중한 교훈이 됐다.
상전은 항상 정보전으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국내기업들의 정보망을 점검해보자.
식품 제조업체인 J사 상무 K씨는 항상 자신의 행선지를 부하직원에게 꼬박꼬박 보고(?)하고 다니는 충실한 상사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갈 때까지의 행적에 대해선 특히 그렇다. 언제 어디서고 회사의 야근당직자와 연락이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내려야하는 수많은 결정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원당을 언제 얼마만큼 사들이느냐 하는 것이고 또 그 결정은 항상 런던의 국제곡물시장이 서는 하오 7시∼11시(한국시간)사이에, 때로는 뉴욕의 곡물시장이 서는 새벽 1시부터 4시 사이에 그때 그때의 국제시세를 보고 받는 즉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런던과 뉴욕시장엔 J사가 4∼5년 전부터 비로소 내보내기 시작한 현지주재원들이 있다. 이들은 매일매일 개장때부터 폐장때까지 적어도 3번은 테렉스 또는 국제전화로 서울 본사에 시황을 보고하는 외에도 갖가지 잡다한 정보를 빠짐없이 모아보낸다.
투기바람이 일 것 같다든가, 혹은 이쪽식 표현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큰 손격인 소련아이들이 곧 대량구매를 시작하리라는 소문이 돈다든가….
서울의 본사에선 본사대로 세계각국의 환율·금리·국제정세·기상 등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최신 자료를 끌어모아 여기에 살을 붙인다.
이정도면 국내기업으로선 거의 완벽한 정보체계를 갖춘 것 같지만 실은 어린아이의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 굴지의 곡물·철강회사인 필립브러더즈사는 지구궤도위에 자체인공위성을 올려놓고 있다. 세계의 기상변화를 꾸준히 체크, 작황 분석과 시장예측의 기초자료를 수집키 위해서다.
우리와 비교하면 처음부터 어른과 아이의 싸움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산지나 국제시장과 같은 「현장」에 국내기업들의「즉각」이 직접 닿는 곳은 원당시장과 같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 원모의 95%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호주에는 매일 미모 국제경매시장이 선다. 세계각국의 굵직한 양모취급상사들이 시장이 열리기 바쁘게 물건들을 떼가지만 우리로선 자격을 갖춘 현지 법인이 없기 때문에 2%의 커미션을 얹어주고 호주상인에게서 물건을 넘겨받아야 한다.
반면 지난해 호주의 경매시장에서 외형거래액 1∼4위까지의 양모취급상은 모두가 일본계 현지법인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원료구입에서부터 유리한 조건의 경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기업들은 원자재를 일본종합상사로부터 많이 사오는데 번번이 뒤집어쓴다.
최근 호주에도 국내사가 참여한 양모가공합작공장이 생기고 또 미국·호주 등지에서 옥수수·석탄을 개발수입하는 등 해외자원의 개발수입에 눈을 뜬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수입원자재를 둘러싼 국내기업들간의 경쟁도 총총 출혈사태를 빚어 국익을 덜어내는 일이있다.
지난해 6월 동자부가 미국산무연탄수입창구를 석탄공사로 일원화하기로 한 것은 국내수입업자들의 과열경쟁이촉진제 역할을 했고 다시 최근에는 원목수입업계의 속사정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
78년 원목이 수입제한품목에서 풀리자 몇 안되던 국내원목수입업체는 한꺼번에 20여개사로 불어났다. 이들이 앞을 다루어 건자재용 침엽수를 들여오는 바람에 80년 3·4분기 이후 세계적인 건축경기침체 속에 미국원목시장에서는 일목이 주로 사다 쓰는 대경목은 값이 떨어져도 우리가 주로 가져다 쓰는 소경목은 도리어 값이 올라가는 기현상을 보였다. 반면 국내재고는 재고대로 쌓여 81년7월말현재 원목총재고는 40만입방m에 달했다. 급기야 비싼 원목을 들여다 제값에 소화시키지 못한 목재상들은 매년 적자가 누적, 최근에는 회생불능의 상태에까지 갔다.
원자재 수급의 흐름이 한 번 빗나가면 개개의 기업뿐 아니라 국민경제자체가 휘청거리는 것이다.
이번 2차 석유파동이 나자 국내종합상사들은 1차 때의 경험에 비추워 값이 오를 것으로 예상, 석유화학 제품을 대량 확보했다. 그러나 값이 오히려 내려가는 바람에 큰 재고를 안고 손해를 봤다.
한국기업들은 일본 종합상사들에 많이 당한다. 그들은 세계적인 조직망·정보망을 통해 정확히 사태를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일이 많다.
상투를 잡게하는 것이다. 거래규모는 커지고 국제화 되었는데 지식·경험은 그렇지 못하니 한국은 냄혹한 국제상전의「착한 봉」이 되는 것이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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