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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수묵산수전' 여는 시인 김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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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인 김지하의 할아버지는 동학운동을 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과거 민주투사의 상징이었던 그는 요즘 동서양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평화운동을 펴고 있다. 그가 변했다고 등을 돌린 이도 많지만 그의 소신은 흔들림이 없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해 일흔셋의 노시인이 “좋다, 좋아”를 터뜨린다. 진한 먹물로 뱀처럼 굽은 길을 천천히, 강약을 조절하며 그려 낸다. 붓이 지나간 길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길 저 뒤로는 백운산이 엷게 펼쳐진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무수막길이다. 먹으로 빚어낸 농담(濃淡)의 차이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외롭고 쓸쓸할 때 찾는 길입니다. 생각이 막히거나 결정할 일이 있을 때도 들르곤 하죠.”

 붓질을 마친 시인이 ‘갑오(甲午) 영일(英一) 모심’이라고 쓴다. ‘갑오’는 2014년 올해요, ‘영일’은 그의 본명이다. 시인은 군사정부 시절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씨다. 40여 년 전 ‘신새벽 뒷골목에 민주주의를 남몰래 썼던’ 시인은 이제 원주 주변의 산과 물을 화선지에 옮기며 또 다른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다음달 8~18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김지하의 빈 산’ 수묵전을 여는 그를 지난 20일 원주시 무실동 시인의 거처에서 만났다.

김지하의 자화상(위쪽)과 수묵산수. 강원도 원주 일대의 자연을 그만의 감수성으로 접근한 산수화가 다음달 40점 가까이 소개된다. 그가 바라본 우주의 진면목이다. 모란·난초·매화도 만날 수 있다.

 - ‘지하’ 대신 ‘영일’이라 썼습니다.

 “1963년 서울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첫 시화전을 열었을 때 지하(之夏)라는 필명을 썼죠. 이름 때문일까, 지하(地下)에 끌려가고, 사형선고도 받고, 천덕꾸러기 노릇만 했어요. 한번은 성명학자에게 물었더니 매일 감옥에 갈 이름이라나, 나 참. 이제는 그럴 일도 없고, 그림에서는 본래 이름으로 돌아갔어요. 꽃 한 송이, 좋잖아요.”

 - 어릴 적 꿈이 글보다 그림이셨죠.

 “네댓 살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제 고향이 전라도 목포, 순 가난뱅이 동네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면 배고프다’며 제 두 손을 묶어 놓았죠. 발가락에 숯을 끼고 회벽에 꽃도, 새도 그리며 반항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하니까 포기하게 됩디다.”

 - 그래도 서울대 미학과에 갔는데요.

 “고등학생(서울 중동고) 때 공부를 잘했어요. 대학 결정을 앞두고 미학과 선배가 와서 꼬드겼죠. 그때 미학과에선 데생·사군자 등 동서양화를 다 할 수 있었어요. 교수가 되고, 돈도 벌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갔어요. 이후 그림보다 문학이 본업이 됐지만….”

 김씨는 난초 그림으로 이름을 떨쳐 왔다. 7년여 투옥 끝에 80년 석방된 후 난초를 치기 시작했다. 옥고로 약해진 심신을 추스르고, 정치권·운동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양법이었다. 먹참선이라고 했다. 바람과 난초를 동시에 포착한 ‘표연란(飄然蘭)’이 일품이었다. 빼어난 기량으로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이후 달마도를 비튼 ‘코믹 달마’ 연작과 눈보라 속에 피어나는 한매(寒梅)로 화제(畵題)를 넓혀 갔다. 2001년 회갑기념전 등 크고 작은 전시를 열어 왔다. 이번에는 총 100여 점이 나온다. 역대 전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뿐더러 그가 산수와 모란을 처음 시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 전시에 대한 기대가 크겠습니다.

 “도록 인사말에 ‘아가리가 딱 벌어진다’고 썼습니다. 그만큼 좋다는 거죠. 그림에 대한 한을 풀게 됐어요.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은 겁니다. 검은 함석집에서 자랐는데 지금 사는 아파트가 그때의 함석집 같은 느낌입니다. 나 때문에 고생만 해 온 아내에게 새 차 한 대 사 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어요.”

 - ‘평생 난을 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주위에서 잘한다, 잘하다 해서 쳤지만, 사실 난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난초는 선비들이 그리는 문인화인데, 저는 타고나기를 ‘쌍놈 그림꾼’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난초에 취미가 있겠어요. 어려서 제일 그리고 싶었던 건 뜰 뒤의 모란이었습니다.”

 - 80년대 재야 인사들이 난초 그림을 팔아 활동경비로 쓴 일화가 유명합니다.

 “소문이 났죠. 아마 수천 장 그렸을 겁니다. 한꺼번에 열 장, 스무 장도 친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 그림이 민주화운동에 사용됐다는 건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 이번에 ‘자화상’이 재미있습니다.

 “달마 대사를 빌렸죠. 우락부락한 게 못생겼잖아요. 마귀같이 보이지 않나요. 사람들은 하늘로 치솟은 눈썹이 저를 빼닮았다고 합니다. 이 눈썹이 없었다면 아마 밥도 얻어먹지 못했을 겁니다.”

 - 역시 수묵산수가 눈에 띕니다.

 “원주가 제2의 고향입니다. 중1 때 아버지를 따라 처음 원주에 왔어요. 전쟁 직후라 쑥대밭이었죠. 2008년 장모(소설가 박경리)가 돌아가시고, 아내가 원주 토지문학관장을 맡게 되면서 저도 함께 내려왔죠. 그리고 영월·제천·충주·여주·이천·용인·철원 등을 돌아다녔어요. 택시 값도 꽤 들었어요. 주변 산하를 순례하며 우리 땅과 사람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 무엇을 배우셨나요.

 “수묵산수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접근입니다.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다르죠. 산(어두움)과 물(밝음), 농경과 유목 문화의 대비 등을 담채(淡彩)와 진채(眞彩)로 드러냈습니다. 원주 부근은 백두대간의 중심입니다. 저는 중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숱한 갈등을 풀어가는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1824~64)의 시 가운데 ‘남신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가 있어요. ‘남쪽의 샛별이 (중조선의) 원만을 얻어야 북쪽의 강물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죠. 무서운 얘기입니다. 제 삶의 주제가 됐죠. 한국이든, 세계든, 우주든, 남과 북이란 대립이 원만을 거쳐야 해소된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그림에 담았어요.”

 - 관념적 사변(思辨)이 아닌가요.

 “지금은 절터만 남았지만 고려시대 원주 거돈사와 법천사 사이의 작은 고개에서 승려 13명이 싸우다 죽은 일이 있습니다. 문자를 멀리한 선종(禪宗) 사찰 거돈사와 학문을 내세운 법상종(法相宗) 사찰 법천사 간에 어마어마한 사상투쟁이 있었던 거죠. 문막에선 궁예와 왕건이 27차례나 피나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8~98)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여성 갑년(甲年)이가 죽은 곳이 양평 두물머리입니다. 그 밖의 예가 수도 없습니다.”

 - 우리가 잘 모르는 얘기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임금 똥구멍 냄새를 맡는 게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민중문화의 르네상스는 이 땅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여성 등 약자들을, 생각이 다른 이를 껴안는 넉넉한 포용이 필요합니다. 그게 개벽이요, 혁명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를 보면 욕부터 나옵니다. 야당은 매일같이 대통령 탓만 하고 있잖아요.”

 - 2년 전 박근혜 대통령 지지의 연장인가요.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은 안 된다고 여러 번 지적했어요. 정치는 강의가 아니라 대화잖아요. 우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해요. 저를 반동분자·변절자라고 하는데, 반동은 공산주의자나 쓰는 말입니다. 저는 원래부터 조직이나 붕당(朋黨)을 피해 왔습니다.“

 - 이 시대에 한마디 하신다면요.

 “자본주의·공산주의, 다 부차적인 겁니다. 판소리·동학·화엄불교 등 민족 전통을 끌어올리는 문화력이 바로 원만이요, 통일로 가는 길이죠. 해방 직후 김구 선생의 첫마디도 문화이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즉 내가 나에게 절을 하는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가 대답입니다. 제게 그림은 그런 인간에, 세상에, 우주에 대한 모심입니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거리의 미학자’로 이끈 스승 김정록 교수

스승 없는 제자 없다. 학생은 선생님의 젖을 먹고 자란다. 김지하씨는 인생의 스승으로 서울대 미학과 김정록(1907~82·사진) 교수를 들었다.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다.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의 굽이굽이와 함께했던 그가 김 교수를 유달리 기억하는 사연은 뭘까.

 김 교수는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1892~1978) 밑에서 배웠다. 궈모뤄는 향후 동양사상이 세계를 끌고 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 조건으로 서양의 좋은 것을 흡수하고, 또 조선의 고대사상을 주목하라고 권했다. 김 교수는 이 생각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동·서양 융합을 시도해 온 시인 김지하의 밑바탕이 됐다.

 “서양도, 판소리도 공부하라고 하셨다. 대학원에 가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지금도 거리의 미학자로 남아 있지 않은가. 고생하려고 작정한 셈이다.”

 젊음의 번뇌에 헤매던 김씨를 구한 것 또한 김 교수의 편지 한 통이었다. 가난과 방황, 폐결핵과 불면 등으로 “죽고 싶다”는 편지를 띄운 제자에게 스승은 열 장이 넘는 답장을 보내왔다. 체관(諦觀)만이 해결의 길이라고 일렀다. 스승은 편지에서 ‘노자에게 배우게. ‘허(虛)’라는 것은 그냥 ‘허무’가 아닐세. 그것은 참다운 용기의 근원이요 체관의 문이라네’라고 썼다.

 “그날로 노자를 읽었다. 허의 본질로 깨달으면 절대 허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20대에 알게 됐다. 선생님은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도리어 세상 속에 편입시켜 주었다. 요즘에도 그렇게 자상한 스승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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