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비야의 길!

언제나 답은 현장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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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비야
구호활동가·이대 초빙교수

여기는 필리핀의 보홀 지진 복구 현장.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깜짝 놀랐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원뿔형 미니 초콜릿을 흩뿌려놓은 듯 앙증맞은 언덕 수백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하여 초콜릿 힐. 여름이 되면 이 초록색 언덕들이 진한 갈색으로 변한다는데 그때는 정말 초콜릿 같을 거다. 우리에게 친숙한 관광지 세부에서 배로 두 시간 거리인 보홀에 지난해 10월 15일 강도 7.2,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32배가 넘는 강력한 지진이 났다. 불과 33초간의 지진으로 1200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무려 7만3000여 개의 건물이 반파 또는 완파되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 중에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성당을 비롯해 1700년대 초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국보급 성당이 10개나 포함돼 있다.

 최고의 공법과 막대한 자금으로 100년 이상 공들여 지은 성당도 단 33초 만에 흔적도 없이 주저앉아 버렸는데 대나무와 코코넛으로 지은 가정집들은 어땠겠는가? 그날이 공휴일이었기에 망정이지 학생들이 수업 중이었다면 포개놓은 빈대떡처럼 내려앉은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큰 인명피해가 났을 거다. 지진 발생 직후 필리핀 정부와 국제사회는 즉각 가장 높은 재난수준인 카테고리 3을 선포해 건물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내고 생존자들에게 물과 식량, 안전한 피난처 등을 제공하는 등 긴급구호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홀 강진이 발생한 지 3주 만에 초강력 태풍 하이얀이 필리핀 중부를 강타해 7000명이 넘는 사상자와 4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이다. CNN과 BBC 등이 앞다투어 태풍 피해를 특집 보도한 덕분에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보홀 지역의 구호 인력과 자원까지 하이얀 현장으로 재배치되면서 이 지역 구호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3주일 만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국제 미디어가 집중 보도하는 재난현장에만 관심과 자원이 쏠리는 이른바 ‘CNN 현상’에 보홀은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방정부와 현지 주민들과 남은 구호단체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홀에는 무너진 건물더미가 그대로 방치돼 있고 많은 재난민은 여전히 비닐 천막 등에서 지내며 상수도 시설조차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면 관심과 자원과 인력을 독점한 하이얀 현장은 어떤가? 각 나라 정부, 유엔, 적십자, 그리고 세상에 있는 NGO란 NGO는 다 와서 돕고 있는 이곳 복구 사정도 내가 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재난 현장이 그렇듯 각 단체들의 로고가 선명한 현수막과 차량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호텔과 고급 식당마다 구호요원과 신문방송팀들이 넘쳐나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갖가지 업무조정 회의를 하고 있다. 하나 여기도 재난 발생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많은 피해주민은 여전히 임시 숙소에서 기거하고 있다.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벌써 주민들이 알아서 대나무 등으로 집을 지었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유엔 및 국제 NGO들의 대형 창고에는 몇 달 전에 배분됐어야 마땅한 긴급 구호물자와 주택 수리 및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 14년간 대형 재난 현장에서 일한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고, 볼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 구호단체들은 저마다 시스템이 있고 필요한 절차와 과정이 있다는 점, 당연히 인정하고 존중한다. 더불어 많은 단체가 같은 지역에서 같은 목적으로 일하려면 수많은 회의와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긴급 구호물자를 쌓아놓고 1년이 다 되도록 이재민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시스템과 절차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반면에 현장에서 만난 재난 생존자들은 발 빠르고 용감하고 지혜로웠다. 태풍 피해를 본 한 마을 주민 300여 명은 길이 모두 유실되고 전기와 통신이 완전히 두절된 와중에도 촌장을 중심으로 부서진 집과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떠내려온 시신 20여 구를 수습하고, 군용 헬리콥터로 투하되는 최소한의 비상식량과 구호물자를 골고루 나누고, 특히 태풍 당일 아이를 낳은 집에는 마른 땔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썼단다. 언제 고립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서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면서 한 달가량을 버텼는데, 그 과정에서 주민들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신뢰와 동지애와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봉화 조기 축구회라고 쓰인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수줍은 듯 웃고만 있던 50대 촌장이 성공적인 초기 재난대응 비결을 말해 달라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마디 한다. “재난 최초 대응자는 우리 주민들입니다. 이번에 대피소에 대형 물통을 준비해 둔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몰라요. 재난 대응을 잘하려면 재난 대비부터 잘해야죠. 안 그런가요?”

현장에 올 때마다 깨닫는다. 언제나, 예외 없이 답은 현장에 있다고.

한비야 구호활동가·이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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