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354>|제76화화맥인맥 월전 장우성(73)|서울대 교수직 사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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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0년 7·29선거로 민주당정부가 들어서면서 학교는 안정을 되찾았다.
장발 학장이 이탈리아대사로 내정되어 후임 학장을 결정해야만 했다.
장학장은 후임으로 박갑성씨를 지명하고 교수들에게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학장은 총장 입석 하에 투표로 결정하게 되어 있어서 윤일선 총장이 학장선출 현장에 나왔었다.
미술대학 교수들은 장 발 전임 학장의 뜻에 따라 만장일치로 박갑성씨를 학장으로 밀어줬다.
이렇게 해서 박갑성씨가 제2대 서울대 미술 대 학장이 된 것이다.
한편 장발 씨는 이탈리아대사로 나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양복이며 모닝 코트 등을 맞추고 학자에서 외교관으로의 변신을 위해 여러 가지를 익혔다.
로마출발을 며칠 앞두고 5·16혁명(61년)이 일어나 장발 씨의 외교관생활은 좌초에 부닥치고 말았다.
나도「학장운동사건」으로 뒤끝이 개운치 않아 학교에 정이 멀어졌다.
게다가 신임학장이 공무원 신분상 사생활을 규제하는 공문이 왔다며 난색을 표명, 일단 사표를 제출했다.
「나그네 입맛 없자 주인 장맛 떨어진』격이 되었지만 막상 15년간이나 봉직했던 학교를 떠나자니 서운한 점이 많았다.
곰곰 생각하니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마치 불명예 제대를 한 것 같아 내 신변부터 정리하고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문희석씨와 감찰위원장 채명신씨도 만나봤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표를 내야할 사유가 못되니 재심을 청구하라고 했다.
재심청구절차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남자가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다져 먹고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자고 작정했다.
매일 나가던 학교를 나가지 않아 어쩐지 허전한 것 같았다.
그래 생계도 생계지만 무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 화실을 냈다.
그때 마침 내게 서울대 미술대학 졸업생과 부인 몇 사람이 개인교수를 받으러 다니던 터여서 그걸 모체로 장소를 빌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상문당 주인 우강(박봉환)이 자기 표구사 근처에 좋은 집이 났다고 그걸 세로 얻어주어 이곳에 화실을 마련, 제자들을 지도했다.
그 집이 바로 관훈동·뒷골목 여흥민씨 집이었는데 2층 양옥이었다.
10여평 되는 방을 화실로 꾸며 「월전화실」이라 명명했다.
내가 화실을 냈다니까 많은 사람이 그림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더우기 미국·영국·일본·프랑스·서독대사관의 외교관 부인들이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와「오환회」를 조직했다.
오환회는 올림픽 마크를 보고 세계의 가족이란 뜻으로 내가 붙인 이름이다.
내 화실에 큰 화탁을 짜놓고 1주일에 한 두 번씩 외교관 부인들을 가르쳤다.
언어·풍속이 다른 이들이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재미있었다.
이때 내게 그림공부를 한 외국인들은 미 해군사령관「프레시」소장부인, 미국 대사관「루이스」참사관 부인 등 20명이나 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이갑성씨 부인 최마리아여사, 박병내씨 부인 최 구 여사, 이범석씨 부인 이정숙여사, 정규섭씨 부인 최인숙 여사와 이인실, 원문자씨 등이었다.
지난해인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비명에 간 연세대병원 신경정신과장 이헌재 박사도 이때 내게 와서 그림을 배웠었다.
외교관 부인들은 자기들의 그림이 신기한 듯 전시회를 열자고 부추겼다.
같이 공부하던 한국인들도 전시회를 한번 여는 게 좋겠다고 해서 62년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오경회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처럼 액자로 표구하지 않고 대부분이 족자로 만들어 출품했다. 오픈 하는 날은 당시 외교사절단장인「상바르」프랑스대사가 나와 축사도 했다.
오경회 전시회는 생각보다 성황이었다.
외교관은 물론 외교관 가족들이 몰려와 이채로 왔다.
신문·방송들도 우리모임을 민간외교의 결실이라고 크게 다루어 주었다.
나는 오환회를 지도하면서 61년10회 국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할 그림을 그렸다.
깨끗한 백로 한 마리가 소나기를 맞고 날아가는 그림인데 명제를 『쏘나기』로 붙여서 냈다.
이 그림은 내가 서울대 미술대학을 퇴임한 후 적막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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