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국<3>|전 런던타임즈기자「로버트·래시」가 4년간 취재한 비화|이집트의 격지 측면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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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73년10월6일 자정에는 이미 수에즈운하에 10개 교량이 가설되고 8만 명의 이집트 군이 시나이반도초입에 진지를 구축했다. 「파이잘」왕의 신호는 허장성세가 아니었음을 이들의 화력은 입증하고 있었다.
이집트 군은 수포(Water Cannon)로 이스라엘 군 진지의 모래방벽을 허물어뜨렸다. 2백22대의 MIG전투기는 파상 공격을 감맹해 공격목표의90%를 파괴했고 손실은 5대가 피격 당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다음날 새벽 이스라엘 군 시나이사령부는 바르레브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군부대에 대해 무기를 파괴하고 항복하거나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7일 아침 8시10분 이스라엘 군 시나이사령부는 포위 당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67년)을 뽐냈지만 우리는 이제 6시간 전쟁의 승리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사다트」이집트대통령은 후에 말했다.
이 시간에 「야마니」석유 상은 빈의 독토르카를링가 10번지에 있는 허름한 OPEC본부건물에서 아랍권 대표들과 새로운 석유가격전략을 숙의하고 있었다. 아랍 대표들은 모두 조간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시나이와 골란고원에서의 아랍 측 승전보를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후에「야마니」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생산을 줄이고 일부국가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하되 석유가격은 별개 문제로 처리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야마니」는 그때 당시의 3달러였던 고시가격을 5달러이상으로 인상하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이 자리에 나와 있던 엑슨석유회사와 셸사의 대표단은 배럴 당 70센트만 올리자는 역 제의로 대항했다.
60년대를 통해 석유 값은 배럴 당 2달러를 밑돌았다. 그러나 60년대 말에 가서 석유과잉현상이 둔화되고 70년 대 초에는 오히려 부족현상으로 역전되고 있었다.
더구나 리비아의「가다피」는 20년 전「모사데크」가 실패했던 석유회사국유화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맺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OPEC는 사상 처음으로 71년 테헤란회의에서 석유회사로부터 석유가 인상을 얻어냈다.
73년 비엔나회의는 OPEC가 두 번째로 석유 값을 올리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인플레로 달러가 실질적으로 평가 절하되어 있었고 석유를 못 구해 안절부절못하던 군소 석유회사들은 이미 5달러를 기꺼이 줄 기미를 보이고 있던 때여서「야마니」는 자기의 요구가 무리하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10월8일 이집트의 진격이 계속되고 있을 때「파이잘」왕은 「사다트」가 리야드로 파견한 2명의 특사를 만났다.
「파이잘」왕의 첫마디는 『당신들은 우리 모두가 긍지를 갖게 해주었소. 지금까지 우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고개를 들 수가 있게 되었소.』
「파이잘」은 당장 무기 구입 비 조로 2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가 주는 돈은 자선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희생으로 바치는 생명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 이 자리에서 석유를 전쟁목적에 이용할 뜻도 확인했다.
다음날 빈에서 석유회사대표들은 4달러이상은 인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야마니」도 5달러이하로는 안 된다고 버텼다.
이스라엘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이 시기에 정치와 석유가격을 더 이상 분리해서 거론하기는 어렵게 돼가고 있었다. 그래서 10월10일 OPEC의 원국 대표들은 다음주 쿠웨이트에서 다시 회의를 갖고 전쟁과 석유정책을 연결시켜 토의키로 하고 해산했다.
석유회사들은 그때까지 배럴 당 5달러 요구에 대한 최종단안을 내리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야마니」는 후에 석유회사들의 인상거부를 이렇게 해석했다.
『석유 값이 인상되면 그들의 이익도 그 만큼 불어나기 때문에 석유회사들은 우리 요구가 싫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상에 대한 비난을 우리에게 넘기기 위해 공식적으로 거부태도를 보인 것이죠.』
사실 이때의 석유가격인상 덕분으로 엑슨회사는 74년 제너럴모터즈사를 밀어내고 총 매상고 세계 제1위의 고지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석유회사의 입장은 그처럼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거의 10년 동안 2달러이하로 고정됐던 석유가격을 5달러로 인상하면 국민들의 광범한 생계비에 큰 변동을 가져오기 때문에 정부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려면 빨라도 2주일은 걸린다.
회의가 끝나는 자리에서 엑슨 측 대표는「야마니」에게『이제부터 어떻게되는가』고 물었다. 「야마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라디오 뉴스를 들어보면 압니다.』
73년10월l6일 OPEC대표들은 쿠웨이트의 셰라턴호텔에서 회동한 후 일방적으로 석유가격을 3·0l달러에서 5·l2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가 불러일으킨 혼란 속에서 세계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석유가격이란 생산국과 소비 국이 석유회사를 거간으로 해서 흥정하는 것이라는 종전의 관계는 무너지고 소비 국이야 원하든 말든 생산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라는 새롭고 불길한 관례가 생겨났다.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달5%씩 석유를 감산하고 결과를 봐서 특정국에 대한 금수조치를 아울러 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본격적인 무기 공급이 시작되었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성급히 금수조치를 취했다가 미국의 전쟁개입을 오히려 촉진하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랍강경파들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흥분하고 있었다. 이라크 석유 상 「하마디」는 중간의 모든 미국석유자본을 국유화하고 미국에 투자된 모든 아랍자본을 회수하며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즉시 단절하라고 요구했다.
리비아대표「마브루크」는 미국 자본 뿐 아니라 외국석유회사는 모조리 국유화해야 된다고 했고 이 회의에 초청 받지 않은 PLO대표는 택시를 타고 회의장에 나타나 팔레스타인의 권익이 의제에 들어가야 된다고 소리쳤다.
이때쯤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그 전날 시나이전선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비터 레이크를 건넜다.
그러나 북부전선에서는 시리아 군이 장악했던 골란고원 일대를 다시 이스라엘 군이 탈환했고 이스라엘공군의 공습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 매월 5%의 감산으로 사태에 영향을 미치려던 사우디아라비아의 계획은 점점 소극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파이잘」왕은 계속 원래전략대로 점진주의를 고집했지만「야마니」는 다음과 같은 원칙문제를 제기했다.
『우리의 석유정책은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입니까, 응징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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